여한의사회 캄보디아 의료봉사 참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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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의사회 캄보디아 의료봉사 참가기
  • 승인 2009.08.1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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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로서의 삶을 생각케 한 소중한 기회

올해는 본과 4학년. 이번 여름이 학생으로 맞는 마지막 방학이기에 무언가 기억에 남는 뜻 깊은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때 마침 대한여한의사회에서 주관하는 캄보디아 해외 의료봉사활동에 대해 듣게 되었다. 세계 3대 빈민국 중 하나라는 캄보디아에 가서 하는 봉사활동이라는 것도 끌렸지만, 다른 봉사활동과 달리 여한의사분들과 같이 간다는 점이 매력적이어서 바로 지원하게 되었고, 운이 좋게 참가할 수 있었다.

■ 새벽부터 환자들 문전성시 이뤄

7월 20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약간 긴장되기도 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함께 가시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오리엔테이션 후 비행기에 탔는데 비행기가 생각보다 너무 작아 살짝 놀라기도 했다.
4~5시간 정도의 비행을 마치고 현지시간으로 12시쯤 도착해 수도인 프놈펜에 짐을 풀었다. 캄보디아는 고온다습하다고 들어서 많이 더울까 걱정했는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우기여서 다른 때보다 덜 더운 편이라고 했다. 오히려 콘크리트나 건물이 많은 한국의 도시에 비해 나은 듯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숙소에서 8시쯤 출발해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헤브론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환자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짐을 풀고 준비하여 개소식을 마친 뒤 진료를 시작하였다.
내가 맡은 일은 주로 예진이었다. 한국어 통역사들은 진료하는 한의사들과 함께 하고, 나는 영어통역사와 같이 진료를 했다. 통역사의 발음이 약간 캄보디아 식이고, 내 영어실력도 부족해 처음엔 의사소통에 약간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내 곧 익숙해졌다. 예진은 기다리는 분들이 많아 빠른 속도로 진행해야 했고, 아무래도 질서를 지키기가 힘들어서 환자들에게 둘러싸일 때가 많았다.

더운 날씨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니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아 땀을 많이 흘려야 했지만, 진료를 받기 위해 우리가 오기 몇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을 환자들을 생각하면 불평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진료를 받기 위해 여기서 몇 시간 떨어진 곳에서 새벽 3시에 집을 출발해 오신 분도 있었다고 한다. 정신없이 예진을 끝내고 나서 약제실에서 약을 나눠주기도 하고, 진료하시는 것을 곁에서 돕거나 심부름을 하는 등 진료와 관련한 일들을 함께 했다.

■ 가난한 아이들 건강상태 심각

예진을 할 때 나이를 적는데, 분명히 15살이라고 하는데 체구로 봐서는 우리나라 7~8살 정도밖에 되어보이지 않아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크지 못한 아이를 보며 너무 안타까웠다. 그리고 빈혈도 많아 눈 밑에 혈관이 보이지 않고 하얀 사람도 많았다. 옆에 함께 있던 통역사도 먹을 것뿐만 아니라 비타민이 부족하다면서 안타까워하셨다.

어느 날은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일찍 강가로 나갔는데 한쪽에서는 에어로빅 비슷한 운동을 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거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 거지아이는 길바닥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못 먹어서 제대로 못 크는데, 어떤 아이는 한두 살 정도로 보이는데도 금목걸이며 팔찌 등 비싼 장신구를 하고 있었다. 서민들은 오토바이 하나 사기도 힘들다는데, 수도 중심가에는 외제차도 많이 보였다. 어느 나라나 빈부 차이는 있지만 캄보디아는 특히 심한 편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캄보디아는 2모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여러 열대과일들 등 먹을 것이 풍부한 기후와 지형을 지녔다. 그러나 옛날 앙코르와트를 짓고 동남아를 대부분 평정한 번성했던 앙코르왕국은 사라지고 ‘폴포트’라는 지도자를 잘못 만나 4년 동안 전 국민의 1/4인 200만 명 정도가 살해 당하고, 결국 세계 3대 빈민국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보다 잘살았다고 하는데 한 순간에 몰락한 것을 보니 새삼 정치와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했다.

총 4일 간 봉사활동을 했는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기다리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재진환자들도 많이 왔지만, 초진 환자들이 정말 많이 왔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마지막 날에 듣기로는 4일 동안 총 1700여 명이 오셨다고 했다. 환자들이 모두 진료를 받고 돌아가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물론 직접 진료하고 환자들이 호전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던 한의사들에 비하면 덜하겠지만, 내가 조금이나마 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항상 가슴 벅차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전해오는 감사의 마음은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그동안 힘들었던 것을 보상해 주는 듯했다. 내가 어설픈 발음으로 캄보디아 말로 인사를 하면 즐거워하고 수줍은 미소를 보여주던 사람들. 사랑과 나눔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눈빛으로 전해진 감사의 마음

마지막 날은 간단히 프놈펜 관광을 한 뒤,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몇백 구, 아니 몇천 구의 유골이 모여 있던 킬링필드, 그리고 고문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마음 한 쪽이 묵직해졌다. 인간의 무지함, 광기 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고,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다시금 깨달았다.

봉사단에 신청하지 못해 직접 캄보디아로 온 동갑내기 민정이, 국제학생회의(HPAIR)에 쓸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와서 도와준 강산이와 진이, 어른 몫을 충분히 했던 귀염둥이 마스코트 지수와 민선이, 그리고 모든 일을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수고한 보라 언니 덕분에 더욱 즐거웠던 봉사활동이었다.

내년이면 졸업이기 때문에 앞으로 한의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여러 선배 한의사분들과 함께 할 기회가 생긴 건 행운이다.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말씀도 해주시고, 많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이정주
원광대 한의대 본과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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