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의계 ‘식민 의학사관’으로부터 탈피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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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한의계 ‘식민 의학사관’으로부터 탈피 절실
  • 승인 2009.08.0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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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의보감 쓰기 위해서는
한의학 정체성 인식부터 고쳐야

한국 약재 처방 통한 한의학 표준화가
400년 지속된 동의보감의 끈질긴 생명력

2009년 7월 31일 새벽,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의 목록에 드디어 이름을 올렸다. 동의보감이 한국의 대표적인 한의서였다는 점, 400년을 이어오며 한국의 한의학을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및 유럽 등지에도 널리 읽혀온 의학서적이었다는 점, 동아시아 전통의학을 대표하는 의서로 공인됐다는 점 등에서 향후 한의학계에 던질 파장은 매우 클 것이다.

다만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의 결정을 한의계가 보다 큰 열매로 키우고, 그 과실을 따먹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하며,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의계 각 분야에서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지정은 중의학에 비해 세계화 작업에 뒤진 한국의 한의약학이 국제무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 특히 중의학과는 다른 한의학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중의학 공정’이라는 표현을 써왔던 것처럼 중의학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하려 노력해 왔고, 심지어 한의학을 조의학(朝醫學)이라고 하여 중국 내 소수 민족의 의학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해온 중의학계에서 가만이 앉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동안 중의학계에서는 한국의 의서들에 대한 몇몇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중국에서 만들어진 내경, 상한론 등으로부터 한국의 의서들이 영향 받았다는 천편일률적인 내용들이다. 향후 각 분야의 학회에서 이와 같은 중의학계의 파상공세가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논리를 늘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일제시대 이후 오랜 시간 한의학의 학문적 연구가 큰 단절을 겪으면서, 한국 내 한의학을 공부하고 한의계를 이끌어온 한의사들이 스스로의 논리와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다수의 한의사나 한의과대학 재학생들이 의학사 분야에서는 일본인 미끼사까에(三木榮)나 양방의사인 김두종(金斗鍾)의 식민사관과 양방의학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중의학계의 논리, 특히 일부 몰지각한 양방의사들의 논리, 즉 한의학의 중의학의 아류라거나 동의보감은 잘못 베껴쓴 짜집기물이라거나 한의학에 뭐 있나 하는 논리에 쉽게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문제는 각설하고 의학사 분야에서 미끼사까에와 김두종의 논리는 하나의 역사관일 뿐이라는 점을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미끼사까에는 그저 일본 제국주의 논리에 충실한 의사학자로서 한국은 식민지로서 스스로 만들어낸 문화와 문물이 없는 국가이며, 모든 문물을 종주국인 중국으로부터 전래됐다는 전제를 갖고 조선의 의학사와 질병사를 기술하였다. 김두종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교육 받은 양방의사로서 만주군 군의관으로 복무하였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소속으로 의학사를 기술하였다.
그는 미끼사까에의 식민사관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틀을 깨기에는 이미 한계가 있는 사람이었고, 미끼사까에의 기술보다 연대를 위로 올려 서술한다든가 한반도의 가교역할론(중국에서 발원한 문물을 일본에 전래하여 꽃피우게 하는 역할)에 충실한 의사학자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개화기 이후 한국의학사는 양방의학을 중심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의학이 쇠퇴하고 필연적으로 서양의학으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한국의학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의학사는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들이 그들의 의학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의 어느 책에서 기원한 의학적인 내용을 어떻게 수용했는지, 무엇을 보고 영향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끼사까에나 김두종은 향약집성방에 대해 내용 대부분이 중국 의서를 옮겨 놓았다고 한다든지, 내경과 같은 수준 높은 의학 이론은 생략한 채 대증요법 위주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든지, 값 비싸고 좋은 중국 약재의 수입대체를 위해 향약을 개발하였다고 한다든지 하는 기술이 대표적인 식민사관에 의한 한국의학사 기술방법이다.
향약이 당약을 수입 대체하기 위해서 개발하였다는 것은 여말선초의 어느 책 어느 구절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17세기 청나라와의 관계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던 때에 나타난 논리일 뿐이다. 단지 값 비싸고 멀리 가져오느라 약효가 떨어지고 구하기 어려운 당약을 굳이 쓸 필요가 없다는 기술이 있을 뿐이다. 향약이라는 개념은 국내 약초를 위주로 개발하여 쓰던 한국 땅에 수입약재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나온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의 교류가 늘어나 약재도 많아지다 보니 중국의 처방도 많이 활용하게 되었을 것인데, 몽고와 전쟁을 치루게 되면서 당약은 전혀 쓰지 말고 향약만 가지고 처방에 활용하자는 것이 향약의학이다. 어떻게 보면 해외와 고립된 국가들이 자급자족의 논리를 펴는 것과 비슷한 개념에서 나온 한국적 의학체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기지 않겠지만 향약집성방에 실려 있는 10,000개가 넘는 처방 속에 마황이나 계지, 감초, 부자 등 일체의 당약이 들어간 처방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향약의학이다. 이러한 향약을 쓰는 전통은 동의보감의 탕액 편과 단방으로 이어져 내려오며, 제중신 편이나 의종손익의 약성가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향약집성방과 향약의학이라는 작은 주제 안에서도 무엇을 기술하였고,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에 대한 다른 논리와 관점이 숨어있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우리 한의계가 국내외적으로 중의학계와 악의적인 양방의사들의 공세를 막아내야 하는데, 한의사들 스스로가 한국의 한의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동의보감은 4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임상적으로까지 많은 활용이 되고 있다. 400년을 이어 내려온 지금에도 많은 활용이 된다는 것은 그 내용의 뛰어남과 우수성에도 기인하겠지만, 우수한 의학서적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것만 갖고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동의보감을 통해 한국의 한의학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향약의학이 정착한 이후 동의보감을 통해 한국의 약재를 표준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용량과 구성이 바뀐 한국식 처방을 표준으로 하였고, 또 독특한 목차를 바탕으로 질병과 증상에 대한 한국적 분류를 표준으로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표준화 작업을 통해 동의보감 이후 다수의 한의학 서적들은 동의보감 식의 약재활용과 처방구성, 질병과 증상의 분류기준을 활용하였고 그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의과대학의 각종 교과서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교과서와 달리 지금의 교과서 안에는 중의학 교재의 내용이 무분별하게 도입되었고, 양방의학적인 내용들도 과목에 따라 통일성 없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최근 10여 년 간 각종 표준화 사업이 진행되었고, 심지어 한중일 삼국 간 전통의학에 대한 용어표준화 방안까지도 논의되고 있는 마당에 한국의 한의학계에서 어떠한 표준을 갖고 지난 400년 간 한의학이 흘러왔는지에 대한 검토와 연구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과거의 동의보감을 무조건 옹호하고 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허준 선생이 현재에 살았다면 양방의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학문을 폭넓게 수용하여 동의보감을 썼을 것이라는 점에 십분 동의한다. 하지만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전통의 정신과 핵심을 분명히 아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강 연 석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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