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맹라(盲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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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맹라(盲癩)
  • 승인 2009.07.2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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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실적에 압박받는 젊은 교수들의 필독서

올 1월말이던가? 제목만으로는 도저히 내용을 가늠할 수 없는 책이 본 지면에 신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맹라(盲癩)』! 한자를 글자그대로 뜻풀이하면 ‘눈먼 문둥이’라는 말인데, 희한하게도 부제는 ‘한의학의 비밀’이라고 붙여져 있더군요. 한 때 학생 전원을 SCI 논문의 저자로 만들어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었던 김형민 교수님 책인지라 관심이 없진 않았지만, 기껏해야 성분연구·동물실험에 관한 이야기이겠거니 지레 짐작하고 구독은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모교의 개교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신 강연 -‘한의학 연구의 정체성 위기’- 을 듣고서는 제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급기야 서둘러 책을 구입하였고, 혼자서만 읽고 지나치기엔 너무 아쉬워 이렇게 다시금 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김 교수님의 이 책은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책입니다. 왜냐하면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빅 브라더(Big Brother)’, ‘미네르바의 부엉이’,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등의 소제목에 별다른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며 읽는다면 술술 읽히는 책이거든요.

하지만, 윌리엄 오컴이 주장한 절약의 원리가,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비롯된 용어 ‘감시’가,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서 내뱉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는 말의 의미가,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할의 확률론을 부정하며 일갈한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게 대체 본문 속의 내용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 따지려면, 또 여간 어려운 게 아니거든요.

각설하고, 책은 총 5부로 나뉩니다. 즉, 1부는 알레르기, 2부는 암, 3부는 골·관절 질환, 4부는 중풍·치매, 5부는 염증·통증 등으로 구분되는데, 글의 진행은 수미일관 그간의 연구성과인 SCI 논문 365편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연유로, 어떤 방법으로, 어떤 잡지에, 어떤 내용을 실었노라 일목요연하게 밝혀놓은 것이지요. 때문에 이 책은 특히 SCI 논문실적에 압박을 받는 젊은 교수들에게는 가히 필독서라 할 수 있습니다. 패러다임 이론을 제창한 토마스 쿤의 말 -“과학자들은 허구한 날 연습문제만 되풀이한다”- 을 빌면, 김형민 교수님이야말로 현 시대에 누구나 따라야 할 가장 훌륭한 ‘범례(範例)’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님은 ‘빌어먹을’이라는 ‘육두문자’도 마다하지 않으며 지금껏 이루어놓은 업적을 못마땅해 합니다. 높은 SCI 논문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쓱싹 먹어 치우셔 놓고도 어느새 철학 없는 영혼, 곧 배부른 돼지가 되었노라 자탄하는 것입니다. 한의학자로서의 양심상 한의학 정신을 바탕으로 한 연구성과가 아니었다는 자기반성 때문입니다. 어떤가요? 한의사라면 “뿌리깊은 고뇌 없이 수행하는 결과지향형 연구는 한의학 발전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김 교수님 말씀에 120% 동의하지 않으세요? 뜻이 같은 이른바 ‘동지(同志)’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김 교수님의 뒤늦은 고해 의식에 한의계의 많은 분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교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이에요. 비록 교수님께서는 “살기 위한 사랑 말고, 사랑 위해 살겠다”고 하셨지만…. <값 1만8000원>

안세영(경희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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