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죽음에 이르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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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죽음에 이르는 병
  • 승인 2009.05.29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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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행동과 운명의 주인공인 자기자신을 극복하자”

지난 1~2주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화두(話頭) 삼아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주초엔 대법원에서 ‘존엄사’를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고, 며칠 지나지 않은 주말 오전엔 전직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사건까지 있었잖습니까?
저 역시 이 두 가지 소식을 계기로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게 연명만을 위한 치료는 진정 무의미한 행위인지 잠깐이나마 자문해 보았고, 또 실존주의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말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 도 재삼 곱씹어 보았답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 일요일에는 5~6년 전 읽다가 너무 어려워 집어던졌던 책을 재차 꺼내 들었습니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덴마크의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다시금 독파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십여 년 정도 독서에 꽤 시간 투자했노라 자신했건만, 덕택에 어렵다는 철학서적에 대한 이해력의 내공도 어느 정도 쌓였으리라 생각하며 들추었건만, ‘혹시나’로 시작한 도전은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ㅠ.ㅠ).

책은 심플하게 단 두 편으로, 그것도 지극히 평범한 두 문장 -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와 “절망은 죄다” - 을 1·2편의 제목으로 삼아 구성되었을 뿐인데도, 속의 내용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마냥 이번에도 도통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첫 대목만 해도 그렇습니다. “절망은 정신의 병, 자기(自己)의 병으로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절망하면서 자기를 가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절망하면서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면서 자기 자신을 욕망하는 경우……” 이게 대체 뭔 말이래요?

물론 여타 다른 서적들을 참고하면,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하는 바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실존주의’란 개인의 자유·책임·주관성을 중요시하는 철학·문학 사조이며, 현대인의 소위 ‘자기 소외’ 과정을 저자는 위의 책에서 ‘절망’으로 분석했다는 것 정도로 말이에요. 결국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각자는 유일하여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공이므로 “자기와 싸워 자기를 극복하라!”로 요약 가능할 듯 싶은데, 이런 저의 자의적인 해석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읽히기 힘든 이 책이 실존주의의 선구적 작품으로 전 세계적인 추앙을 받는 이유는 입센·야스퍼스·릴케·카프카·하이데거·까뮈·사르트르 등과 같은 후세의 걸출한 문학가와 철학가들 덕택일 것입니다.
일견 난삽해 보이는 글에 내재된 속 깊은 의미를 꿰뚫고, 이를 바탕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품들을 내놓음으로써 이른바 ‘원조(元祖)’ 격의 사람과 글까지 더불어 빛을 발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길몽(吉夢)인지 흉몽(凶夢)인지는 해몽(解夢)에 달려있다”라고 비유해도 될까요?

문득 『황제내경』이 떠오릅니다. 한의학의 비조(鼻祖)라 일컫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펼치기만 하면 으레 난독증(難讀症) 환자가 되게 만드는 『소문』·『영추』 각 81편 말이에요. 특히 왕빙(王氷)이 보입(補入)한 것으로 추정되는 ‘운기(運氣) 7편’은 현대 천문학적 지식까지 동원하여 파악하지 않으면 완전 뜬구름 잡는 소리 같잖아요?
이런 점에서 자·타천 한의학 전도사의 멋진 해설서를 염원합니다.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자 또 다시 소설가 박상륭 님의 『죽음의 한 연구』를 읽어봤자, 이해도 불가할뿐더러 너무 고통스럽지 않겠어요? <값 9800원>

안세영(경희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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