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한의대, 고전교육 내실있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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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한의대, 고전교육 내실있게 하자
  • 승인 2009.03.2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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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희대에서 야심차게 추진하는 교육 개혁안이 대내외적으로 좋은 반향을 얻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표된 독서프로그램의 경우, 그 거시적인 취지와 스케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인 한의대생들의 경우, 한의대에 들어와서 소위 ‘한의학적 사고’를 너무 열심히 기르다 보니 일반적인 교양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경우가 상당한 것이 사실이었다.

헌데, 목록들을 훑어보다 보니, 약간의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자본론』이나 『국부론』을,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읽고 독후감 한 편 달랑 써서 제출하면 끝이라고?
추천자께서는 『자본론』이 한국어판 기준으로 다섯 책 분량의 거질이며, 경제학 전공자들조차 읽기 버거워하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고전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 방법론일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안 읽어본 책”이 고전이라고들 한다.
사람들의 입에는 많이 오르내리되, 막상 읽어보려 책을 펼치는 순간 그 특유의 난해함으로 인해 훌륭한 수면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설사 난해함이라는 높은 진입장벽을 넘었다손 치더라도 독자 본인의 흥미나 관심사와 동떨어진 주제라 좌절하기도 쉽다.

책이라는 것이 자기가 보고 싶어서, 재미있게 읽어야 맛 아닌가. 헌데 고전 목록이란 것이 존재하고, 요런요런 책들을 읽고 독후감을 써 오지 않으면 유급시킨다, 이런 위협(?)을 해야 하는 상황부터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고전의 처지를 재확인시켜주는 현상 아니겠는가(오해하지 마시라. 고전이라는 책들도 실제로 읽어보면 엄청나게 재미있고 벅찬 감동을 주는 책들이 많다! 안 그랬으면 그 고리타분한(?) 책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읽혔겠는가).

해서 오랫동안 고전교육을 해온 교육 선진국이나, 요 근래의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고전을 학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 위한 교수방법 개발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전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당연히 교수부터 해당 고전에 대한 모든 배경지식과 논의 주제에 대한 사항을 꿰뚫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소수의 학생들과 직접 머리를 맞대고 격의 없는 토론을 하면서 학생들의 동기를 유발시키게 된다.

이렇게 고전을 철저히 읽고 토론하고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쓰는 방식의 수업이 바로 교육 강국인 미국 명문 대학의 文理大(College of Liberal Arts)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형태이다. 말이 쉽지, 교수 한 명이 학생 열 명 남짓 앉혀놓고 이런 시간을 꾸준히 가진다는 것은 엄청난 인적, 재정적 자원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튼튼한 제도적, 재정적 뒷받침과 오랜 노하우에 바탕을 둔 교수법으로 이뤄져야 할 고전교육을, 도서 목록과 노트 한 권 던져주고 시늉만 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고전교육이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했을 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법률과 제도가 그런 것 같다. 처음에는 최선의 의도로 만들지만, 운영주체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파급효과는 큰 차이를 가져오는 것 아니겠는가. 섬세함이 요구되는 교양교육은 더욱 더 목록과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차근차근 正道를 밟으며 내실을 다져나가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 경희대는 고전·교양 교육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소위 文理大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학부 중의 하나이며, 이곳에는 한국 지성계에서 독특한 담론을 펼치는 쟁쟁한 교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경희대에 거는 기대가 큰 까닭이 여기 있다. 고전교육, 그 운영의 묘를 잘 살려 최선의 의도에 걸맞는 최선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경희대일 수밖에 없기에.

손광석
한의사, 도서출판 校正醫書局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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