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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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27)
  • 승인 2009.03.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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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

박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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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드롬(paradrome)의 해석(하) ■

역경(易經)에서 풍천소축(風天小畜 : 괘)괘 다음에 나오는 괘는 천택리(天澤履 : 괘)괘입니다.
천택리(天澤履)괘는 하늘(괘) 아래 연못(괘)이 있는 모양입니다. ‘밟아 나간다(履)’라는 뜻의 천택리괘가 ‘조금 쌓인다(小畜)’는 풍천소축괘 다음에 나오게 되는 이유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많이 모이게 되면, 자연스레 순서나 차례를 생각하게 되는, 즉 ‘예(禮)’를 갖추어 나간다는 것에 있다고 서괘전(序卦傳)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건이 많아지면 크고 작음, 높고 낮음, 예쁜 것과 미운 것 등의 구별이 생기므로 그에 따라 먼저 함과 나중에 하는 등의 예절이 만들어지고, 그 예절을 실천해 나간다는 뜻으로 ‘밟아 나감(履)’을 설정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밟아 나가는 많은 것 중에는 호랑이 꼬리 같이 위험한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호랑이 꼬리를 밟더라도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바로 ‘형통’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履虎尾 不咥人 亨). 우리 속담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라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호랑이의 꼬리를 밟더라도 물리지 않는 길을 찾아보아야

역경에서는 호랑이 꼬리를 밟더라도 물리지 않기 위해서는 ‘부드러움으로 기뻐하며 굳센 것에 응하라, 이로써 호랑이 꼬리를 밟더라도 호랑이가 사람을 물지 않아 형통하게 되는 것이라(彖曰 履柔履剛也 說而應乎乾 是以履虎尾不咥人亨)’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말입니다만, 결국 맞서 싸우지 말고 부드럽게 적응하여 험난하고 위험한 시기를 잘 넘기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물론 ‘위기의 상황’에서는 나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상대방을 제압하는 ‘힘의 과시’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택리(天澤履)괘’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르침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헤쳐 나가라’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없이 부드럽거나 나약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굳센 의지로 ‘주인의식’을 가지며 흔들리지 않아야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剛中正 履帝位 而不疚 光明也). 즉 모질고 험한 상황에서는 일단 부드러운 자세로 주위나 상대방에게 적응하면서도, 내 안에는 굳센 의지를 가지고 중심을 잡아 나가서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자세를 고수함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밝은 미래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 부드러움으로 응해 나가되 굳건한 주인의식을 가져야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과 같이 나라의 경제가 흔들릴 때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수많은 비판과 어두운 전망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은 삼가되 내부적으로는 일관된 정책기조를 갖고 흔들리지 않고 추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희생물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호랑이 꼬리를 밟고도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는 것과 같이 ‘미국 발 세계경제 위기’의 복판에 있으면서도 경기침체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으려면 ‘적절한 순응과 확고한 주인의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편의 하나가 위아래를 잘 가려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象曰 上天下澤 履 君子 以 辯上下 定民志). 경제의 어려움이 오래가고 점점 심해지는 것 같으면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또한 나이 든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대로,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들대로 고민이 쌓이고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가장으로서의 막중한 역할이 있기에 ‘실직(失職)’의 두려움이 커지기 마련이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막 새로운 사회생활을 희망차게 해보려고 하는데 막상 일할 곳이 없어서 겪게 되는 좌절감과 상실감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직자를 줄이고 새로운 일자리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천택리(天澤履)괘의 첫 번째 효는 ‘소박하게 행해 나갈 것(初九 素履 往 无咎)’을 강조하였습니다. 화려한 ‘말의 잔치’는 필요 없습니다. 거북이가 뚜벅뚜벅 한걸음씩 걸어 나가듯,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나가듯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의 눈부신 업적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들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작더라도 ‘본디의 모습’을 실천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소박하면서도 어지럽지 않은 실천의 길

계속해서 그렇게 본디의 길을 소박하게 걸어 나가는 것이 탄탄한 길이고, 요란하지 않은 사람이라야 바르고 좋으며 중간에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는 것(九二 履道 坦坦 幽人貞吉 象曰 幽人貞吉 中不自亂也)입니다. 처음에 소박한 길을 걷기로 해서 나아가 보니 길이 탄탄하고 평탄해서 쉬운 듯이 느껴지면 자칫 방심하여 중간에 마음이 현란하게 되어 어지럽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택리(天澤履)괘의 육삼(六三)효에서는 이것을 ‘마치 볼 수 없는 사람이 능히 보는 것 같고 다리가 마비된 사람이 능히 걸어가는 것처럼 쉬이 하게 되면 호랑이를 밟아 사람을 물게 되는 것이니 흉한 것이라. 힘만 센 사람이 통치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같음이라(六三 渺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爲于大君)’고 설명합니다. 걸어가는 길이 평탄하고 쉬운 것임을 자칫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착각하여 자만하고 자찬(自讚)하게 되면 오히려 호랑이에 물리듯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사효(九四爻)에서는 조심하고 삼가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였으며(九四 履虎尾 愬愬 終吉 : 愬-두려워함), 구오효(九五爻)에서도 흔쾌하게 밟아 나갈 수 있으나 바르게 해도 위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九五 夬履 貞 厲).

모두 평탄한 길이라 할지라도, 조심해서 밟아 나가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평탄한 길을 살펴서 두루 돌아 나간다면 크게 좋으리라고 천택리(天澤履)의 마지막 효인 상구(上九)에 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上九 視履 考祥 其旋 元吉). 호랑이 꼬리를 밟은 듯한 어려운 시절에는 ‘본분에 충실한 이행(素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천건(重天乾)괘에 나오는 내용 중에 ‘바람은 호랑이를 쫓아가니(風從虎)’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 글귀와 함께 ‘호랑이의 꼬리를 밟되 물리지 않는다’는 천택리(天澤履)괘의 이미지는 ‘바람(風)’에 의한 다양한 증(證)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동의수세보원에서는 ‘입에서 쓴 맛이 나고(口苦), 목안이 마르며(咽乾), 눈앞이 아찔하여 현기증이 나고(目眩), 귀가 멍멍하여 곪은 듯하며(耳聾), 가슴과 옆구리가 답답하여 그득하며(胸脅滿), 혹 덥고 추운 것이 반복되면서(寒熱往來) 구역질이 나면(嘔) 「소양상풍증(少陽傷風證)」이니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을 사용할 것을 권한 바 있습니다. <격주연재>

박완수
경원대 한의대 병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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