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과 문래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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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과 문래의 진실
  • 승인 2009.02.0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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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수 동국대 한의대 명예교수는 본지 489호(2004년 11월 22일자)에 강병수 교수의 본초이야기(17)-‘문익점 사업과 약초탐사’라는 주제로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글 중 문래의 개발·보급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문익점 선생의 후손이 문제를 제기해옴에 따라 강병수 교수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다시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옛날 선비들 중에는 글 쓰는 것을 꺼려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학자가 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필자는 “전통한의학을 찾아서”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한의대 학생들이 처음 대하는 한의학에 대하여 정신적 갈등과 이해가 부족하여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언젠가 시간이 있으면 한의학의 전통사상과 한약에 관한 내용을 현대적 관점에서 쉽고 재미있게 책으로 만들어 보겠다하여 생각날 때마다 제목을 수첩에 적어놓았다.
그 후 퇴임을 하면서 제목을 정리하는 와중에 ‘문익점 사업과 약초탐사’라는 글을 써넣게 되었다.

필자는 나이도 많이 먹었고 시력도 좋지 않아 컴퓨터를 가까이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요즘 자식들이 집에 와서는 컴퓨터에 내 이름을 쳐보니까 필자의 책에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도 재배하게 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정문래(鄭文來)에 의하여 제사(製絲)용 물레를 만들어 의료사상 크게 공헌하였고…”라는 글 중 ‘정문래’가 문제되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이 글을 놓고 문익점 선생의 후손인 文某 씨가 네이버에 문익점과 문래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고 저자의 인신에 관한 글을 몇 차례 올려놓았다. 물론 가문의 후손으로서 당연한 주장일 것이다.

필자는 이 제목의 글을 쓰면서 서재 앞에 꽂혀 있는 國史大事典(李弘稙 博士 著, 大榮出版社, 1977년)의 목화(木花)란 481쪽에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재배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하였다. 정천익의 아들 문래(文來)가 제사법을 발명하였으며…”라는 글의 내용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옮겨 적는 과정에 정문래가 된 것이다.

李弘稙 박사는 최근세 사학자 중에서도 최초로 동경제국대학에서 史學을 전공하고 연세대,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국내 사학발전에 크게 기여한 학자로 고려대 도서관장까지 지냈다.
일반적으로 필자와 같이 사학이 전문분야가 아닌 경우 국사대사전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일반적인 글을 쓰는 데 남의 족보까지 보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와 같이 가계보를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본인과의 충분한 대화 없이 공개 비판하는 것을 보자니 저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섭섭한 점이 남아있다.

후손 문모 씨의 주장과 같이 문익점선생의 손자 문래가 옳다면 당연히 文氏가계보와 국내 사학가들의 저서 개정판을 수정하고 본의 아니게 문제된 점에 대해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文 씨의 가계보를 의도적으로 오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해두고 싶다.
더욱이 이홍직 박사가 史學家로서 왜 그렇게 기술했는지도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문익점 선생의 훌륭한 업적을 통해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국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식물이나 약초에 관한 인식을 전환하는 데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술하게 되었다는 점을 깊이 이해하고 양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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