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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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24)
  • 승인 2009.01.0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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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

박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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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드롬(paradrome)의 구성(하) ■

지난 호의 산수몽(山水蒙 : 괘)괘 다음에 나오는 괘가 바로 수천수(水天需 : 괘)괘입니다. 수천수(水天需)괘는 하늘(괘) 위에 비구름(괘)이 있는 모양, 즉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비가 올락 말락하는 분위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수몽괘가 아직 어려서 ‘자라나야 함’이 필요한 괘라면 그 어린 것을 잘 자라도록 먹이고 키워야 하는 것이 바로 ‘수천수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어린 풀이 비를 잘 맞아야만 건실하게 쑥쑥 잘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림’의 의미가 ‘수(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자를 풀어보면 ‘비(雨)’가 ‘머뭇거리는(而)’ 모습을 나타냅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가 이윽고 비가 내리면 물이 사방에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물댈 수(需)’로도 풀이됩니다. 온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듯 땅위에 물이 흐르고 퍼지면서 세상의 어린 것들이 잘 자라도록 돕습니다. 그리하여 ‘돕는다(需)’는 의미도 나오게 됩니다.

□ 때로는 매우 힘들지만 기다림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렇듯 기다림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는 ‘서두르는 것’을 만류하게 됩니다. 서두르지 않기 위해서는 참고 기다리면 좋은 것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천수괘의 괘사에 처음 나오는 말이 ‘믿음을 둔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만 ‘성장’과 ‘결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누군가를, 무엇인가 나를 도와줄 사람을 기다리면서 하는 일이 바로 밝고 형통하여 바르게 되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남몰래 나에게 재물을 많이 갖다 주는 것은 잘못하면 불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도움을 받되 떳떳하게 받을 수 있는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당당한 도움을 받고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물길을 건너가면서도 큰 이로움이 생길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단사(彖辭)에서 이르기를 ‘구한다는 것(需)’은 ‘모름지기 기다리는 것(須)’이니 험한 것이 앞에 있음이라. 강건하면서도 자칫 험한 곳에 빠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뜻이 곤란해지지 않는 것이라(彖曰需는 須也 險在前也 剛健而不陷 其義 不困窮矣)고 하였습니다.
‘하늘(天)’의 강건(剛健)함은 때로는 조급히 움직여서 자칫 잘못하면 웅덩이 같은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함정에 걸리면 헤어나기도 어렵고 오히려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강한 것만 믿고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거나 오히려 목표지점에서 더 멀어지게 됩니다. ‘기다림의 미학’은 어떤 면에서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미학’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때가 경제난의 시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서둘러서 무엇인가를 강하게 밀어 부치다보면 반대로 역효과를 가져 오거나 경기침체가 더 심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강성함만을 믿고 무조건 ‘앞으로 돌격’하게 된다면 후방에서의 보급로나, 측면에서의 지원군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하여 적군에게 포위되어 크게 패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내 안에 하늘(天)같이 강건한 의지가 있다할지라도 눈앞에 너무 험한 상황(水)이 펼쳐져 있으면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곤란하고 궁색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천수괘의 모양을 보고 공자는 “구름이 하늘 위에 있는 것이 기다리는 것(需)이니, 군자가 그리하여 먹고 마시며 다 같이 즐거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象曰 雲上於天 需 君子 以 飮食宴樂).
편안한 기분으로 몸과 마음을 살찌우며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기다리되 불안에 떨거나, 아니면 우울해 하지 말고 ‘넉넉한 마음’으로 다가올 세상을 긍정적으로 예측하여 낙관적으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태양인의 급박함은 넉넉한 기다림으로 풀어야 하듯이

수천수(水天需)괘의 맨 아래, 첫 번째 효(陽爻이므로 初九)에 대하여서는 ‘들판에서 기다리는 것이니 이로운 것은 항상됨이어서 허물이 없으리라(初九 需于郊 利用恒 无咎)’고 하였으며 그 모습(象)을 풀이함은 ‘어지러운 행동을 범하지 않는 것(象曰 需于郊 不犯難行也)’과 ‘떳떳함을 잃지 않는 것(利用恒无咎 未失常也)’입니다.

두 번째 효(陽爻이므로 九二)에 대해서는 ‘모래판에서 기다리는 것이니 조금 말들이 있을 것이나 마침내는 좋을 것이리라(九二 需于沙 小有言 終吉)’고 하였고 뒤이어 모습을 풀이함은 ‘넉넉함으로 중심을 삼으면 좋게 끝날 것이라(象曰 需于沙 衍在中也 雖小有言 以吉終也)’입니다.

세 번째 효(陽爻이므로 九三)에 대해서는 ‘진흙벌에서 기다리니 도적이 오리라(九三 需于泥 致寇至)’고 하였고 상(象)을 풀이함에 ‘재앙이 바깥에 있으니 조심하면 낭패치 않으리라(象曰 需于泥 災在外也 自我致寇 敬愼 不敗也)’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 효(陰爻이므로 六四)에는 ‘피가 흐르며 기다리는 것이니 동굴에서 나옴이라(六四 需于血 出自穴)’고 하였으며 모습을 살펴 이름에는 ‘순순하게 듣는 것이라(象曰 需于血 順以廳也)’고 하였습니다.
가히 오랜 기다림 끝에 내부의 상처를 딛고 밖으로 나와서 다가오는 변화를 과감히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안에서 아옹다옹하며 서로 가지겠다고 싸우지 말고 과감히 밖으로 나와서, 더 넓은 세계의 가능성에 눈을 뜨는, 이른바 ‘블루 오션’을 찾아보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효(陽爻이므로 九五)에 대해서는 ‘먹고 마시며 기다리는 것이니 바르고 좋은 것이리라(九五 需于酒食 貞吉)’고 하였으며 덧붙여서 ‘써 중심을 바르게 함이라(象曰 酒食貞吉 以中正也)’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효(陰爻이므로 上六)에 대해서는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니 천천히 세명의 손님이 있어서 다가옴에 공경히 대접하면 마침내 좋을 것이리라(上六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來 敬之終吉)고 하였고 그 모습에 덧붙여서 말하기를 ‘비록 적당한 위치는 아니나 큰 실수는 없을 것이라(象曰 不速之客來敬之終吉 雖不當位 未大失也)고 하였습니다.
문득 기다림에 지쳐 집으로 들어간 뒤에 뒤늦은 손님들이 오더라도 문전박대하지 않고 융숭히 대접하면 큰 손해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늦을 수밖에 없는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한다면 좋을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한의학에 있어서 ‘기다림’ 즉 ‘나아가지 말고 퇴각하여 편안히 머물러야 함(不進而退 安居于中)’이 강조되는 곳은 ‘동의수세보원’의 ‘사상인 변증론(四象人 辨證論)’입니다.
즉 태양인은 한걸음 물러나서 급박한 마음을 늘 안정시키면 장수할 것이라(太陽人 退一步而恒寧靜急迫之心 如此則必無不壽)고 하였습니다. ‘기다림(需)’의 의미가 치측(治則)으로 강조되는 증(證 ; paradrome)이 도출될 수 있기도 한 부분입니다. <계속>

박완수
경원대 한의대 병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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