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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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23)
  • 승인 2008.12.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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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

박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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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드롬(paradrome)의 구성(중) ■

지난 호의 수뢰둔(水雷屯 : 괘)괘 다음에 나오는 괘가 바로 산수몽(山水蒙 : 괘)괘입니다. 산수몽괘는 산(괘) 밑에 물(괘)이 흐르는 모양입니다.
깊은 산에 들어서다보면 문득 나타나는 작은 옹달샘의 모양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작은 샘이지만 여기서 산속의 동물들도 목을 축이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물을 마시며 손도 닦는 귀중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로부터 생명이 나오듯이 이렇듯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곧 ‘어림’의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어리기 때문에 때로는 어둡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길러짐과 입혀짐을 받아야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찌됐든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계속 자라나야 하는 성질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산수몽(山水蒙)’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길러져야 할 것인가. 계속해서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는 그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괘를 판단하여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彖曰).
‘몽(蒙)’이라는 것은 산 아래에 험한 것이 있는 것이니 험하면 그치는 것이 또한 몽이라(蒙山下有險 險而止 蒙).
‘몽형(蒙亨)’이라고 하는 것은 형통하게 행하여서 때때로 적중하는 것을 의미함이라(蒙亨 以亨行 時中也).
‘내가 아이의 어림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의 어림이 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뜻이 응하는 것을 말한다(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志應也).
‘처음 예상하여 알린다’는 것은 강인함으로 적중하는 것이요(初筮告 以剛中也), ‘두 세번 반복하여 예상하면 어지러워질 것이니 어지러워지면 이야기하지 말 것이라’고 한 것은 그 어린 것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再三瀆 瀆則不告 瀆蒙也).
어려서 바름을 키우는 것이 바로 성인이 되는 노력이다(蒙以養正 聖功也). 즉 산수몽괘에서는 ‘가르침’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만물이 이제 막 생겨서 자라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러한 ‘실패’를 통한 완성의 길로 들어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새가 처음에는 날지 못하고 푸드득거리기를 몇 번씩, 자꾸 바닥에 떨어지다가 결국에는 하늘로 날 수 있는 것처럼 어린 아기도 몇 번을 바닥에 고꾸라진 다음에야 두발로 늠름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단계를 설명한 것이 ‘산수몽(山水蒙)괘’인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러하듯 자신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험난함’에 간혹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면 멈추어야 합니다. 사나운 개가 자신을 보고 무섭게 짖거나 발 앞으로 시냇물이 콸콸 흐르면 멈추고 서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돌봐줄 어른이 와서 위험물을 제거하든가 아니면 아기를 안고 물을 건너가야 할 것입니다.
때에 맞게 형통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시중(時中)’의 의미가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실수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혼내서는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육을 함에 있어서 때로는 쓰러진 아이를 잡아 세워주며, 무릎의 흙도 털어주고 다독거려주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아이가 혼자서 일어나 스스로 걸어 오게 하거나 앞을 잘 보고 걸으라고 훈계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아이가 구함을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즉, 아이가 누군가의 구함을 절실히 바라는 정도로 심하게 다쳤을 때는 가서 도와주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스스로도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자립심을 갖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두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뿐만 아니라, 나라의 살림을 이끌어 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서 ‘몽(蒙)’의 시기와 비슷한 경제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기업들과 사람들에게 때로는 ‘운용자금이나 채무의 면제’ 등의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도록 간접적인 회생유도책을 베풀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때에 적절함(時中)’에 대한 판단이 어렵고도 중요합니다. 미국이 자국의 경제회생을 위해서 은행과 금융계에 수천 억 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시기와 미국 내 3대 자동차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정부자금을 지원하는 방식과 시기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 ‘적절한 때’를 찾기 위한 진통이 아닐까 합니다. 한의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감모(感冒) 초기의 오한(惡寒), 발열(發熱), 두항강통(頭項强痛), 脈浮)에는 표실증(表實證)을 치료할 수 있는 발산(發散)·해표(解表)의 처방위주로 대처해야 할 것이지만 감모(感冒) 후반기로 들어선 경우의 마른 기침(乾咳), 혹은 마른 가래(燥痰), 무오한(無惡寒), 미열(微熱) 등의 폐음허증(肺陰虛證)에는 보음윤폐(補陰潤肺)하는 약재나 처방들을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각기 다른 처방은 각기 다른 증(證 : paradrome)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은 곧 아이가 처한 각기 다른 ‘상황(situ-ation)’이 되기도 하고 회사가 갖고 있는 각기 다른 ‘경영상태·경영지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즉 ‘상황’의 분석을 위해서는 그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그 상황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성분체(構成分體)’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탐색이 필요한 것입니다.

‘증(證)’에 있어서의 ‘구성분체(構成分體)’는 바로 각각의 증상·증후(sign or symptom)들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폐음허증(肺陰虛證)’이라는 paradrome(證)을 이루고 있는 것에는 ‘마른 기침·밭은 기침, 농후한 가래, 목이 쉼, 미열, 건조한 피부’ 등이 포함될 수 있겠습니다만 ‘갑작스러운 설사, 눈꺼풀의 떨림, 무릎이 시면서 아픔’ 등의 증상이 포함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paradrome에 어떠한 증상들이 포함될 수 있는가를 기존의 의학서적(예 : 동의보감, 동의수세보원, 상한론 등)을 통하여 우선 익히게 되며 그 학습을 통하여 일종의 내재된 규칙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체득된 규칙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이 제시되는 환자들의 증상들을 특정 증(證)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이것을 ‘변증(辨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변증(辨證)’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많은 선행요건들 중의 하나가 기존의 ‘증(證 : paradrome)’에 대한 학습이며 그것은 곧 증(證)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증상들에 대한 이해이기도 합니다.

학습과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일관성(一貫性)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산수몽(山水蒙)괘에서는 첫 번째 점으로 알려줄 것이지 두세 번, 반복해서 예상해보고 알려주는 것은 일을 망치는 것, 곧 어지럽히는 것(瀆)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어지럽힐 바에는 아예 알려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정책의 혼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잦은 말과 방침의 변경이 성장과 학습을 망쳐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나라의 경제에 있어서도 정책의 일관성이 없이 자주 이리저리 바뀌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너무 치료법이나 처방을 자주 바꾸는 것은 오히려 회복을 늦출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격주연재>

박완수
경원대 한의대 병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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