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성학집요(聖學輯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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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성학집요(聖學輯要)
  • 승인 2008.11.0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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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집대성한 한국적 리더십의 원형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조선 성리학의 원류로 꼽히는 율곡 이이가 임금의 학문을 위해 대학의 본뜻을 따라 사서와 육경에 수록된 성현의 말씀을 엮어 임금께 바친 글이다. 특히나 이는 선조(宣祖)를 향한 율곡의 충정이니,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왕을 견제하고 교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왕도의 본질을 유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려 한 것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선조는 사전의 학습이나 준비나 뒷받침이 될 아무런 권력의 기반도 없이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된 군주이다. 때문에 새로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사림파와 훈구척신의 세력 사이에서 국정을 운영하고 대립된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했다. 이 긴장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면 반드시 군주독재나 관료의 부패가 결과로 나타난다.

고대에는 덕 있는 자가 제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가 타락하고 군주의 지위가 세습되면서 유덕자가 제왕이 된다는 소박한 믿음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길은 군주에게 덕을 갖도록 요구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군주의 권력을 견제하고 군주를 교육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1568년 즉위한 지 1년 반을 지난 열일곱의 어린 선조에게 성리학의 핵심이념을 열 폭으로 그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생애 마지막 벼슬인 대제학을 사직하고 올린 예순여덟의 퇴계 이황의 마음이나 그로부터 7년 뒤인 선조 8년(1575) 홍문관 부제학 율곡이 『성학집요』를 올린 마음이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마음을 살펴보자면, 한 해 전(1574년)에 율곡이 당시의 폐단을 진단하고 개혁의 방법을 논하여 올렸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 그 한 대목을 우리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상황은 선조들이 남겨놓은 은택이 이미 다하고 권력을 차지한 간신이 남겨놓은 해독이 바야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올바른 의론이 시행된다 하더라도 백성의 힘은 이미 바닥이 나버렸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한창 젊었을 때 술에 빠지고 여색을 탐하여, 해독이 될 단서가 많았으나 혈기가 한창 강하여 몸이 상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만년에 이르러 해독이 노쇠함에 따라 갑자기 나타나, 비록 근신하고 조섭하여 몸을 보양한다고 하더라도 원기가 이미 쇠퇴하여 지탱할 수 없게 된 것과 같다. 오늘날의 상황이 참으로 이와 같다.”

정치적 상황을 의학에 빗대어 적절하고도 참으로 명쾌하게 율곡은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 그러나 어쩌랴! 군주를 교육하고자 하였던 성학(聖學)의 가르침은 실패하였으니, 조선사회의 총체적 모순을 드러낸 임진왜란은 율곡이 「만언봉사」를 올리고 나서 20년 뒤에 현실이 되었다.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영란비전론편(靈蘭秘典論篇)」에서 지적했던 “군주가 밝으면 그 아래 백성이 편안해진다(主明則下安)”는 사실이 어그러진 것이고, 그리하여 군주의 실책을 만회하여 피폐한 백성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당시의 『의림촬요(醫林撮要)』나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출현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으리라. <값 3만2천원>

김홍균
서울 광진구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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