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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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19)
  • 승인 2008.10.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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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

박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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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드롬(paradrome)의 변환(상) ■

지난 호의 천뢰무망(天雷无妄 : 괘)괘 다음 순서로 역경(易經)에 나오는 것이 산천대축(山天大畜 : 괘)괘입니다. 산천대축괘는 산(괘) 아래 하늘(괘)이 있는 상(象)도 되고 거꾸로 하늘(괘) 위에 산(괘)이 있는 모양도 됩니다. 하늘 위에 산이 있음이라. 바로 ‘첩첩산중’이 떠오릅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위를 쳐다보면 까마득히 많은 나무, 나뭇잎들이 하늘 높이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험준한 산속의 낭떠러지 위에서나 산 중턱에서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면 굽이굽이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마치 하늘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즉, 산 밑으로 하늘이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젓는 발아래로는 푹푹 밟히는 것이 마치 두터운 흙더미를 쌓아 놓은 것 같은 낙엽들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쌓이되 크게 쌓여서 대축(大畜)이라 하였습니다.

일단 이 괘가 주는 이미지는 ‘넉넉함’이라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산천대축괘를 설명하는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크게 쌓임은 바르게 함이 이로운 것이니(大畜 利貞)’입니다. 물자가 풍부할수록, 생산물이 많아져서 축적이 많이 될수록 ‘바르게’할 것을 우선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단순히 많이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이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 물을 많이 섞고, 또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멜라민’이라는 ‘우유 내 단백질함량 적합판정 유도물질’을 첨가하는 것이 결국은 전 세계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크게 축적하지만 바르지 못하면 이롭지 못하다’라는 산천대축괘의 뜻풀이와 연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산업의 대량 재생산(각종의 파생상품)들도 그 운용에 있어서 정도를 벗어나 ‘바름’을 잃게 되면 현재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금융홍역처럼 일종의 ‘재해’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쌓되 바르게 하는 것이 이롭다’라고 첫 마디에 언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말이 ‘집에서 먹지 않음이 좋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로움이라’입니다. 이것은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위한 이익추구(家食)’에 대한 경고와 풍요로움이 주는 나태를 벗어나 도전하는 삶의 자세를 가질 것(利涉大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판단해서 말하는 것에는 ‘대축은 강건하고 독실하며 빛이 나서 매일 그 덕을 새롭게 함(彖曰大畜 剛健 篤實 輝光 日新其德)’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만큼 대축이 가지는 긍정적인 면이 많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굳셈이 올라가서 어진 이를 숭상하고 능히 굳건함을 그치게 함이 크게 바른 것이라(剛上而尙賢 能止健 大正也)’라고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강한 자가 권력을 가지게 되더라도 어진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것과 단지 강한 권력만을 휘두르지 말고 때로는 그칠 줄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지게 되더라도 지나치게 휘두르지 말 것이며 현명한 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권력남용’의 누를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크게 쌓이는 것 중에는 표가 쌓이는 것도 있고, 표가 쌓이는 것은 현대와 같은 민주주의의 시대에는 곧 권력이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득표를 통하여 권력을 얻게 되더라도 ‘바르게 함이 이롭다(利貞)’는 것이며 비록 주어진 권한을 집행한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그칠 줄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집에서 밥 먹지 않음이 이롭다는 것(不家食吉)’을 ‘어진 이를 기르는 것(養賢也)’으로 풀이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재화를 가지고서 ‘나’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그치지 말고 ‘타인’을 위해서 혹은 ‘사회’를 위해서 사용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은 하늘의 뜻에 응하는 것(利涉大川 應乎天也)이라 하였습니다. 즉, 하늘이 이렇게 풍요로움을 주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도전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하늘의 명(命)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대목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문구가 떠올려지게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프랑스말로 ‘가진 자의 의무’라는 뜻으로 원래 노블리스는 ‘닭의 벼슬’, 오블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달걀을 낳는 데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즉 어떤 명예나 권위에는 그에 합당한 의무나 솔선수범함이 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풍요로움이 주어진 만큼 위험한 일에 직면하여도 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축괘(大畜卦)에서도 여섯가지 정도로 우여곡절이 있음을 각 효사(爻辭)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효사에서는 ‘위태하니 그만두는 것이 이로우니라(初九는 有厲리니 利已)’라고 하였습니다. 풍요로움, 혹은 크게 쌓여서 강건해졌음을 믿고 지나치게 밀어 붙이는 것이 위험함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히 굳건함을 그침(能止健)’이 떠오르는 효사입니다. 이렇게 그쳐야만 재앙을 피할 수 있다(象曰 有厲利已 不犯災也)고 하였습니다. 너무 많이 쌓여 있음에 자만하지 말고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효사에서는 ‘수레바퀴에서 바큇살이 빠짐(輿脫輹)이라’ 하였습니다. 첫 번째 효사와 마찬가지로 아직 나아갈 때가 아니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레바퀴에서 바퀴살이 빠지면 수레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 같이 현재의 상황은 무엇을 펼치는 것도, 행하는 것도 없이 그쳐(止) 있는 것이 좋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가운데 있는 것이니 걱정이 없다’고 덧붙였습니다(象曰輿脫輹 中 无尤也).

첫 번째 효와 두 번째 효가 지나치게 나서거나 권력의 남용에 대한 경고라면 세 번째 효사부터는 자신의 의무에 대한 충실한 이행을 권장하는 것 같습니다. 즉 세 번째 효사에서 ‘좋은 말로 쫓아감이니 어렵고 바른 것이 이로운 것이요(九三 良馬逐 利艱貞)’라 했고, 네 번째 효사에서는 ‘어린소의 뿔처럼 나아감이 크게 길한 것이요(六四 童牛之牿 元吉)’라 했으며, 여섯 번째 효사에서는 ‘어느 하늘의 거리인가 형통하니 이는 도가 크게 행해짐이라(上九 何天之衢 亨 象曰何天之衢 道 大行也)’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크게 쌓여서(大畜) 큰 내를 건너가는 것이 하늘의 뜻에 맞는다(利涉大川 應乎天也)는 것과 비슷합니다.

크게 쌓인 뒤에 다음 단계에서, 마치 큰 강을 건너듯, 다른 상태로의 변환이 일어나는 것이 이 산천대축(山天大畜)괘로부터 연상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의학에서도 어떤 한 변증체계에서 많은 증(證; paradrome)들이 만들어지고 성숙되어진다면 다음의 어떤 단계에서는 다른 변증체계 내로 전환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패러드롬의 변환(paradrome shift)’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박완수
경원대 한의대 병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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