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31] 李羽龍(1910~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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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31] 李羽龍(1910~1979)
  • 승인 2008.10.0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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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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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제도 제정과 한의협 창설 주도

“過去 中國에서 漢醫 洋醫의 法令制定에 資格 다툼의 싸움이 벌어져서 肉迫戰에서 銃으로 싸우다가 나중에는 砲門을 걸고 싸웠다. 그래서 兩側 死傷者가 數千名에 달하게 되어 漢醫가 勝利하여 漢醫가 國醫로 되고 洋醫가 時代 吸收醫로 된 醫療法令이 制定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우리는 이같은 主張이 아니고 漢醫 洋醫 동등권의 醫療法이 制定되어야 할 것이며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漢醫 洋醫 사이에 또 하나의 三八線의 不祥事가 되는 것입니다. 또 經濟面에 있어서 醫藥品을 外國産에만 의존한다면 장차 三千里 江山을 팔아 먹게 되는 經濟破綻이 일어날 것이니 여기에 反해서 莫大한 外貨를 획득하고 있는 漢醫術의 發展은 國家經濟 向上에도 지대한 공헌이 될 것을 확신한다.”

위의 증언은 李羽龍이 한의사제도의 창설을 위해 국회사회보건분과위원회에서 1951년 증언한 내용을 鄭源熹가 요약한 것이다. 李羽龍은 1952년 한의사제도가 공포된 후에 부산피난시절에 한의사협회를 만들면서 초대 회장, 2대 회장을 역임한 한의계 역사의 산증인이다.

李羽龍은 尹武相, 禹吉龍, 權義壽, 鄭源熹 등과 함께 韓國醫藥會(이른바 五人同志會)를 결성하여 전쟁기간 부산 국회시절에 한의사제도를 창설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았다. 부산에서 활동한 한의사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한의사제도를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金永勳, 方周赫, 朴鎬豊, 朴性洙 등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한의사들과 힘을 합쳐 국회의원들과 활발히 교섭하면서 국회에서 증언을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李羽龍을 비롯한 尹武相, 禹吉龍, 權義壽, 鄭源熹 등은 국회사회보건분과위원회에서 한의사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증언하게 되는데, 이들의 증언에 힘입어 한의사제도가 성사되게 된 것이다.

그는 한의학교육에도 매진하였다. 부산에서 한의학교육을 위해 전쟁 직전부터 운영된 동양의학전문학원(1957년 동양의약대학에 흡수됨)은 해방 후 부산의 한의학 교육의 산실이었다. 그는 이 학원을 인수하여 학원장을 하면서 尹武相, 禹吉龍, 權義壽, 鄭源熹 등 한의사들을 부원장으로 앉히고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된다.

李羽龍은 또한 부산시 서구 효성동에 정인한의원이라는 한의원을 개설하여 진료를 하였고, 1973년에는 한의사면허를 갱신하여 면허번호 1번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한의사제도를 창설할 당시에는 부산피난시절로서 한의계는 각종 어려움에 직면한 상태였다. 그는 회장을 맡으면서 제반 사회의 혼란한 상황을 원숙하게 처리해나가 신망을 쌓아갔다.

1955년 학술지 『東洋醫藥』이 창간호를 간행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창간사를 쓰고 있다.

“漢醫學은 三千餘年 悠久한 時日을 내려오며 東洋數億萬人의 保健을 獨自擔當하여 온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에서 民衆을 統禦하는 爲政者라면 治民治病의 方法을 알어야 한다. 그러한 政綱이 되어 있기 때문에 牧民官을 選拔하되 醫學을 考試條件으로 한 時代도 있었던 것이다. 中華北方에서는 ‘做官的 正會醫術’이라는 諺語도 있고, 朝廷에서 太醫院長官을 五品階級에 列하기 때문에 醫師를 尊稱하여 大夫(光祿大夫等)라 稱하기까지 하였다. 人倫에 嚴重한 父母를 孝養하자면 醫術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孟子所謂 ‘事親者, 不可不知醫’라고 한 말씀이 이것이다. 이렇게 人類生存에 필요한 學問이 되어 있기 때문에 學者가 倍出하여 硏究에 硏究를 加하고 發明에 發明을 더하여 그 深奧玄妙한 眞理를 闡明하여 왔었다.”

이 글을 통해 李羽龍은 한국 땅에서 한의학이 필요한 이유를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역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57년에 나온 『東方醫藥』 3권 1호에는 당시 대구한의사회 간사인 金祚錫의 다음과 같은 찬양의 글이 있다.

“六二五事變後 國民醫療法制定時 釜山市本會의 前會長 李羽龍氏를 爲始하여 禹吉龍, 尹武相, 權義壽 등 諸氏는 物心兩面으로 全力을 다하여 漢醫師制度를 法文化하도록 目的을 達成하여 存在가 뚜렷치 못하던 漢醫生이 漢醫師로 國民保健의 醫療를 擔當하였으니 以上諸氏의 功勞야말로 우리 漢醫學史上에 永久히 빛날 일이며 우리 漢醫學者로는 다같이 이분들의 功績을 讚揚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월 1회 게재>

金南一(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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