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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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14)
  • 승인 2008.08.1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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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

박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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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드롬(paradrome)의 출현(중) ■

지난 호의 천풍구(天風姤 : 괘)괘에서 첫 번째 효(爻)에 이어 두 번째 효도 양효(陽爻)에서 음효(陰爻)로 바뀌면 곧 천산돈(天山遯)괘가 됩니다.
돈괘의 모양(괘)은 하늘(天)아래 산(山)이 있는 상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물러남’으로 처음에 설명하였습니다.

돈(遯)의 파자 역시 돼지(豚)가 달려 가는 것(辶)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저기 먼 하늘 아래로 산봉우리가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산세가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을 의미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양효가 첫 번째에 이어서 두 번째도 물러난 상태입니다. 곧 음효는 두 번째 효까지 나아 온 것이지요. 양효(陽爻)가 두 번째 자리까지 내주었으니 ‘물러남’의 느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러남’의 의미를 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陽)이 물러났음에도 결코 우울하지 않습니다. 양은 강한 것이지만 ‘물러남’으로 인해서 오히려 ‘형통(亨通)’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작으나마 ‘이로움’과 ‘바름’까지 갖출 수 있습니다(小利貞).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물러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연한 자리에 강하게 있다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행하여 물러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대개의 강함은, 즉 ‘양’은 물러나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물러남은 곧 ‘패배’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물러남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할 수 없기까지 합니다.
그런 경직된 자세에 ‘물러남이 형통하며 작은 이로움과 바름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충격적일 수도 있습니다.
사고의, 생각함의 부드러움을 요구하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생각함의 부드러움이라,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러남을 통하여 소인을 멀리할 수 있으니(遠小人) 악하게는 하지 말고 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不惡而嚴).
소인을 피해서 물러나기는 해도 남은 곳을 어지럽힌다든지 망가뜨린다든지 하지 말고 위엄을 갖추고 물러서라는 것이겠지요.
이에 추가하여 첫 번째 효를 이야기함에 있어 ‘물러남의 꼬리가 위태하니 쓰는 바를 두지 말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물러날 때는 가능한 한 깨끗이 물러나야지 이것저것 따지듯이 눈치를 살피면서 물러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물러나면서 여기저기 참견하거나, 여기저기에 미련이 남아서 자꾸만 발을 걸쳐 놓으면 오히려 위태할 수도 있으니 미련 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러나면서도 자신의 바른 뜻은 굳건히 가지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누런 소의 가죽처럼 단단한 것을 쓰듯이(執之用 黃牛之革).

물론 이 때에는 다른 것들이 함께 얽혀서 같이 물러나지기 때문에 때로는 피곤하여 병이 있어 위태할 수 있으므로 큰일을 도모하기보다는 그저 내부를 보완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합니다(係遯 有疾 厲, 畜臣妾吉 不可大事).
하여 물러남이 좋아서 군자는 길할 것이요(好遯 君子 吉) 아름답게 물러남에 바르고 길함이 바른 뜻으로써 하기 때문이라(嘉遯 貞吉 以正志也)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기를 물러남에 살찌게 되니 이롭지 아니함이 없다(肥遯 无不利)라고 ‘물러남’의 이로움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습니다. 결코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속담에서 ‘지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양보의 미덕에 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수 많은 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앞에서 이끄는 사람과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많이 발생합니다. 즉 같은 편 안에서도 의견충돌이 의외로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돈(遯)’의 의미를 되새겨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하면 위험하니까 안된다고 하는 쪽과 그 정도는 괜찮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쪽이 맞설 때 ‘물러남’을 생각해봅니다.

의학에 있어서도 다양한 증상과 질병에 대하여 약간은 상반된 의견의 치료법, 즉 해결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의학과 한의학이 다를 수 있고 한의학 내에서도 다를 수 있습니다. ‘감기’라고 하면 양의학에서는 ‘해열, 진통, 소염, 비점막충혈 완화, 기관지 확장, 항생요법’ 등을 제시하지만 한의학에서는 ‘발산풍열, 발산풍한, 청열해독, 청화온담, 온화한담, 통규, 방향화습’ 등을 제시하게 됩니다.

한의학내에서도 ‘태음증, 소음증, 소양상풍증, 태양한궐증, 양명증 등등’ 다양한 분류에 따라 각각의 처방이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물론 처방이나 치료법이 제시되는 문제항목들(이른바 ‘증상들’) 자체가 조금씩 다릅니다. 즉 ‘증상’이 달라지면 당연히 ‘처방’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문제가 달라지면 ‘해답’도 달라지는 것처럼.

‘패러드롬(paradrome)’은 이렇게 ‘문제-해답’이 같이 묶여지거나 아니면 특정한 방향의 해답이 나오도록 문제항목들을 선택적으로 모아놓은 형태의 ‘의도적 문제묶음 혹 증상묶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격주연재>

박완수
경원대 한의대 병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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