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만의 티베트 이야기(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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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만의 티베트 이야기(20)
  • 승인 2008.07.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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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꽃향기는 바람결에 휘날려~

깃발이 만들어내는 묘한 감동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대중을 선동할 때는 늘 깃발이 동원되는 것이다. 마오쩌뚱은 붉은 오성기 휘날리며 중국 인민을 선동하여 중화인민공화국(1949년)을 건국하였다. 티베트불교의 룽따와 타르쵸는 衆生의 마음을 선동하고 궁극적으로 淨化한다.

실띠 같은 길을 걸어서 몇 굽이 넘으면 고개 너머 그리운 마을이 있고 아득한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있다. 긴 나무 기둥과 폭은 좁지만 세로로 길게 걸린 깃발이 보인다. 이것을 룽따(Lungda)라고 부른다.
이 룽따를 意譯하면 풍마(風馬)라고 한다. 바람에 휘날리는 룽따를 보면 달리는 말의 목 뒤에 휘날리는 털이 연상된다. 그래서 ‘바람의 말(風馬)’이란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이런 룽따가 있는 곳은 티베트 불교도들이 사는 마을이다. 그런 곳에서 만났던 순박한 세르파, 라다키, 티베탄들의 미소가 그립다.

타르쵸는 높은 언덕이나 고개에 주로 있다면, 룽따는 마을의 중심이나 불교 사원(Gompa)에 주로 위치한다. 고딕식 첨탑처럼 룽따는 높고 길게 하늘로 통해있다. 그래서 룽따를 보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란 直感을 느끼게 한다. 룽따는 內向的이고 上昇이며 垂直的인 느낌을 준다. 上求菩提(위로 깨달음을 구한다)하는 의미로 와 닿는다.

지나왔던 유롱라나 락파라 같은 고개에도 수많은 ‘타르쵸(Tharchog)’가 걸려있다. 높은 언덕과 고개에는 타르쵸가 늘 만국기처럼 사방으로 현란하게 걸려있다.
그 타르쵸가 열렬히 바람에 휘날리며 떠는 소리가 기억난다. 높은 한 정점을 기준으로 사방팔방으로 땅에 연결된 만국기 닮은 깃발을 보면 ‘낮은 데로 臨하소서’(이청준 소설)라는 말이 떠오른다.

긴 줄에 걸려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에는 팔리(Pali)어로 된 경전의 법어들이 인쇄되어 있다. 깃발은 바람과 하나가 되어 역동적이고 정열적이며 선동적이 된다. 성스러움이 감도는 오색 깃발에 인쇄된 활자를 일별하는 순간 꽃이 된다.
그리고 꽃향기는 바람결에 휘날려 멀리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그 꽃은 나비를 불러들이고 나비는 다시 훨훨 날아가 다른 꽃들에게 꽃가루(花粉)를 전해 줄 것이다. 그렇게 수정된 씨앗은 어딘가 땅에 뿌려져 뿌리를 내리고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이런 염원을 바람에 날리며 기원한다. 그래서 이 風塵 세상이 西方淨土가 되는 유토피아를 꿈꾸는지 모르겠다. 타르쵸는 外向的이고 下降이며 水平的이다. 下化衆生(아래로 중생을 敎化하여 濟度)하는 의미 같다.

타르쵸는 돌탑이나 나무의 주위 사방에 걸려서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의 움직임(心動)이 느껴진다. 貪嗔癡(탐욕. 성냄. 어리석음)라는 三毒이 가장 마음을 動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역동성은 탐진치(貪嗔癡)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탐진치는 모든 중생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 탐진치가 없었다면 지구 생태계의 연속성은 당장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탐욕을 사랑한다. 성냄도 사랑한다. 어리석음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 이렇게 말한다면 고타마 싯다르타는 (인도에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見指忘月하고 있다고 질책할 것이다.
살아가는데 공짜는 없다. 대가없는 것은 없다. 인생은 절대 남는 장사가 아니다. 빈손으로 돌아간다. 因果應報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 이것이 물리학의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너지는 그 형태가 바뀌더라도 그 합은 언제나 일정하다)이다. 티베트불교는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이 아닌 살리는 善業을 쌓아 業障消滅해 나갈 것을 역설한다.

어차피 이 자연계는 雲雨之情을 나눠 상하사방에 바람을 만들고, 아래로 물을 흘려보내지만 다시 햇볕에 기화해 올라가는 물처럼 공간을 순환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사철 안에 순환한다. 가득한 곳에서 텅 빈 곳으로 흘러간다. 텅 빈 곳이 채워지고 가득한 곳이 텅 비기도 한다. 이렇게 變化하는 것은 不完全과 未完成이란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운동이 곧 살아있음이다. 모든 것이 다 완벽해버리면 변화와 운동이 존재할 수 없는 죽음이 된다.

風塵世上에 살아있으면서 본능과 삶의 의지에 충실하다보니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이란 탐진치 때문에 순간순간 괴로워한다. 이렇게 삶 중간중간에 쌓이고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는 것이 종교의 큰 역할인 것 같다. 깃발과 바람이 하나가 되어 그러한 本質을 감싸고 있는 苦와 執을 산산이 부셔버리고 산화시켜버리면 껍데기는 가고 道(苦集滅道)만 남을 것이다. 깃발은 감성의 煽動에서부터 마음의 淨化까지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바람이 흔들리는가, 깃발이 흔들리는가’라는 禪問에 대한 答은 ‘非風幡動唯心動(바람과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이 움직인다)’이다. 그러나 갈지(之)자로 다시 答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바람도 깃발도 없는 죽음일 뿐이다(不動心이면 無風幡而死已)! 〈계속〉

김규만
서울 은평구 굿모닝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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