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28] 權義壽(1908~1989)
상태바
[近現代 韓醫學 人物史28] 權義壽(1908~1989)
  • 승인 2008.07.04 13: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남일

김남일

webmaster@http://


한의사제도 창설에 기여한 實踐躬行家

1968년 9월 25일에 제1회 한방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한의학 중흥을 위해 마련된 이 기념식은 1951년 9월 25일 한의사제도가 포함된 국민의료법이 공포된 것에 따라 9월 25일을 한방의 날로 정하여 첫 행사를 하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李羽龍, 權義壽, 尹武相, 禹吉龍, 鄭源熹, 金永珍, 洪鳳述, 方周赫, 金永勳, 呂元鉉, 金翼基, 朴永出, 任永信 등 인물들이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자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한의사제도가 포함된 국민의료법이 제정될 당시 기여한 인물들이었기에 포상한 것이었다.

이들 가운데 눈에 띠는 5인의 인물들이 보인다. 일명 “5人同志會”라고 불린, 부산시에서 활동한 李羽龍, 權義壽, 尹武相, 禹吉龍, 鄭源熹 등의 다섯 한의사들이다. 이들은 부산피난시절 정부가 국민의료법을 제정할 계획을 세워 제2대 국회가 이를 심의할 즈음에 활동을 개시하여 한의사제도를 쟁취해낸 것이다.
5인의 인물 가운데 權義壽라는 인물이 눈에 띤다.

權義壽(1908~1989)는 경상남도 창원 출신으로 3대를 이은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가업을 잇기 위해 한의학에 입신한 인물이다. 그는 13세에 이미 四書三經을 無不通達하였다고 하여 총명한 두뇌로 이름이 높았고, 마산 창신중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는 한의학에 투신하여 한약종상시험과 한의사 시험을 무난히 합격하여 한의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의 집안은 한의계의 명문가문으로서 三世醫業을 계승하여 4대로 이어지는 전통을 이은 것이었다.
權義壽는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한 입법활동을 하면서 1951년 부산피난지에서 열린 國會社會保健分科委員會의 開會席上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의학은 檀君聖祖의 創建史와 함께 우리 民族의 保健生命을 담당한 醫學이다. 學術의 由來는 中國이나 우리나라에서 重創的인 發展을 거듭하여 우리나라의 醫學發達은 오히려 中國을 凌駕하였으니 高麗의 達醫 薛景成은 元太祖 忽畢烈의 病을 往治하여 후상을 받았으며 新羅 哲醫 毛治는 倭皇 允恭天皇의 病을 往治하여 역시 厚賞을 받았으며 李朝의 名醫 許浚이 著述한 『東醫寶鑑』은 中國 名醫들이 이는 東醫寶鑑이 아니라 天下寶鑑이라 極讚하였으며 近古의 哲醫 李濟馬는 四象醫學을 發明하였으니 祖國再建의 이 國土에서 永遠不滅의 한의학이 될 수 있는 醫療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尹武相에 이어 이어진 그의 증언은 한국의학사 속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 찬란했던 한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었다. 말을 적게 하고 實踐躬行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평소 성품으로 보았을 때 증언대에서 발휘한 그의 육성은 매우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尹武相, 權義壽, 李羽龍, 鄭源熹으로 이어진 국회에서의 증언은 의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본회의장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게 되었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한의학은 역사에 남는 이정표를 세우게 된 것이다.

權義壽는 부산에서 나중에 동양의약대학과 통합된 부산동양의학전문학원 강사로 활동하면서 한의학 교육일선에서 노력하였다. 東洋醫學會學術院이 결성된 다음에도 학술원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술적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生理學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삶의 신조는 “의약가로서 실력배양에 노력하며 의약본의를 자체가 상실함은 한의학계의 궤멸을 자초하는 것으로 단정하며 나아가서 만민에 병고를 갖어다 주는 것이 된다”이다. 1957년 나온 한의사협회의 기관지 『東方醫藥』에 실린 그의 이 경구는 모든 한의사들이 기억해야 할 名句이다.
이렇듯 權義壽는 한의사제도의 창립에 기여한 인물로서 역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월 1회 게재〉

金南一(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