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칼럼] 원시반본(原始返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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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영 칼럼] 원시반본(原始返本)
  • 승인 2008.06.2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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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에 입문한 지 어언 30년이 다 되었음에도, 한의학의 ‘본질’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성을 깨치기 이전부터 이미 자연계의 뭇 동식물들과 함께 존재했던 인간! 그 인간의 건강과 질병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본디 어불성설이겠지만, 어쨌든 협의(狹義)의 한의학 - ‘인체의 질병과 치료에 대한 인식 도구 체계 및 방법’ - 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때문에 ‘본질’ 파악에 도움이 되는 ‘특성’ 몇 가지를 들곤 하는데, 한의학의 가장 큰 ‘특성’은 역시 ‘역사적 통시성(通時性)’이다.

생명 현상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는, 최첨단의 ‘바이오테크놀로지’가 실현 가능한 21세기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들은 여전히 『황제내경(黃帝內經)』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만 뜨면 달라지는 세상인지라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뭔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의사는 아직도 ‘일침·이구·삼약(一鍼·二灸·三藥)’으로 요약되는 2,500여 년 전의 치료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바로 이런 고루함이 역설적으로 한의학의 가장 큰 장점이다. 서양의학을 보라! 여태껏 정설과 최선의 치료법으로 여겨지던 것이 신 학설과 신 치료법이 등장하자마자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조차 불분명하게 물러나지 않는가?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을 격하면서도 고금이 자연스레 소통되는 한의학! 한의학의 이런 특성은 우리들에게 으레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를 요구한다. 흔히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로 번역되는 이 사자성어에 대한 해석은 의외로 다양한데, 출전(出典)에서처럼 단순히 ‘스승의 자격(爲師)’ 조건으로 한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훨씬 진보적 관점으로 과거-현재-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해야 된다는 학문을 접하는 사람의 당위적 태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연암 박지원이 새롭고 자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며 주장한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온고’와 ‘지신’, ‘법고’와 ‘창신’! 수구적 보수와 창조적 진보로도 운운되는 이 양단(兩端)은 둘 다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근래 한의계의 양상을 감안하면 전자 쪽이 더욱 절실해 보인다. 날로 악화되는 환경을 이겨내고자 활로를 추구하는 여러 모습들이 오히려 본말전도의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이기보다는 ‘다양성’이 인정되고 발휘되는 사회가 보다 성숙한 사회임에는 틀림없지만, 몇몇 방법들은 마치 ‘쇼(show)를 하라!’는 선전 문구에 영합하듯 색다른 보여주기에 치중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을 종교인 양 신봉하며 ‘경전 무오류설’을 주창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서투른 지식으로 조급하게 판단한 뒤 근거조차 박약한 새 방법만을 좇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 진정 창조적 비판자가 되기 위한 우선 요건은 ‘온고’·‘법고’에 있기 때문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증학(考證學)’을 보라! 『본초강목(本草綱目)』도 못 믿겠다며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을 종주로 삼지 않던가? 우리들 역시 『상한론(傷寒論)』을 공부하려면 『강평본(康平本)』을 봐야 하지 않던가?
‘처음의 의미와 상태를 되살려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원시반본(原始返本)’! 어려울 때일수록 뿌리에·바탕에·근본에 충실해서 노력해야 한다. 지엽이 근간을 대신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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