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래로원장’ 5백회 맞은 만화가 김판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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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래로원장’ 5백회 맞은 만화가 김판국 화백
  • 승인 2008.04.1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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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다하는 날까지 펜과 잉크 놓지 않겠다”

민족의학신문 미래로원장이 제657호(4월 21일자)로 500회를 맞았다. 미래로원장 연재만화가인 김판국 화백(62)은 “벌써 500회나 됐느냐”며 놀라워했다.
경북 영주가 고향인 김 화백은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정치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시사만화를 그리고 있으니 꿈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1965년 영주의 영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6년 군에 입대했다. 특전사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0여 년간 전우신문(지금의 국방일보)에 만화를 연재하면서 그의 만화인생은 시작됐다. 월남전에 참전할 당시에도 잉크를 들고 갔을 만큼 그에게 만화란 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다.
1975년 즈음 모 방송사 코미디언 1기 시험에 응시한 특이한 이력도 있다. 아마 만화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코미디언 시험에 낙방하고 얼마 후 경향신문에 입사한 그는 그때부터 20년간 청개구리(만화주인공 이름)를 연재,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으며 이름을 알렸다.

그의 또 다른 직업은 목사다. 청개구리 만화를 연재하던 어느 날 출근길에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 순간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며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했다. 비슷한 증상으로 여러차례 병원에 실려갔지만 병원에선 아무런 이상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지인의 권유에 따라 신학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신학공부를 시작한지 8년 만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95년 경향신문에서 농민신문으로 적을 옮긴 그는 농민신문 신우회에서 설교를 맡아오고 있다.

김 화백이 민족의학신문과 인연을 맺게 된 건 1996년 9월 2일자. 대판신문이었던 민족의학신문이 독자들의 의견을 수렴, 타블로이드로 전환하게 되면서 네 칸 만화연재가 시작됐다. 올해로 13년째다.
만화는 글이 아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보니 용어선택적인면이나 전문지라는 측면에서 어려움도 있지만 한의학발전에 작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는 그는 이따금씩 주위의 한의사들로부터 만화를 잘 보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500회인 줄도 몰랐는데, 기분이 좋죠. 모두 기억에 남지만 만화적인 센스가 반영된 그림들이 조금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올해로 네 칸짜리 만화가 인생 40년을 맞았다. “원래 신문만화는 종합예술이에요. 사회·경제·문화 할 것 없이 두루 알아야하니까 만물박사가 돼야하죠. 하지만 일로 인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걸 보면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특별한 달란트를 주신 것 같아요.”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다.

그는 현재 민족의학신문 외에도 10여 곳 이상 만화를 연재 중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만화를 그리고 주말엔 주례를 보느라 바쁘다. 지인의 부탁으로 우연히 주례를 맡게 된 것이 인연이 돼 벌써 100쌍의 커플이 그의 주례를 거쳤다.
맡은 일에 충실하다보니 길이 계속 열려왔다는 그에겐 소망이 하나 있다. “전에는 그저 다른 사람들한테 폐 안 끼치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데, 돈은 어떻게 버는가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앞으로 베푸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생이 다 하는 날까지 만화를 그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부인 김경자 씨(54)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뒀다.

민족의학신문 강은희 기자 leona01@mj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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