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만의 티베트 이야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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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만의 티베트 이야기(7)
  • 승인 2008.03.2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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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티베트 저항의 근원 - 포탈라궁 & 달라이라마

지난번 글에서 티베트 독립에 대한 언급을 했는데 以心傳心이었는지 티베트 인민들의 저항이 보도되고 있다. 거대한 中華라는 용광로는 왕성한 식욕으로 소수민족과 영토를 삼켰다.
너무 먹어 소화불량증에 걸린 중화인민공화국은 ‘스테로이드를 맞은 거대한 어미 돼지’를 연상케 한다.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돼지가 새끼를 깔아죽이지 않던가? 이들의 예측할 수 없는 손과 발과 몸뚱이에 치이지 않기 위해서는 늘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할 것 같다.

티베트의 정신적인 근원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포탈라궁을 보기 위해서 나섰다. 시가체 출신 원주민 가이드 촌탁(Chontak)이 나와서 영어로 가이드를 한다.
국영여행사에 지불하는 가이드 비용이 1인당 거금 30$이다. 포탈라궁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이 숨이 가쁘다. 천천히 “고소보행법”으로 가슴을 펴고 멀리 보면서 경사진 길을 올라간다.

포탈라궁에는 성상과 우상을 연상케하는 것들이 수없이 존재했다. 이 원색적인 종교 색채가 강한 곳에서 종교적으로 무장되지 않고 각오가 대단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 것 같다. 무섭고 흉칙하며, 때로는 인자하지만 이 많은 상을 보면 머리가 너무 답답해 오는 느낌이 든다.
엄밀하게 포탈라궁은 종교적인 수행장소가 아닌 왕궁이다. 이제는 박물관(Museum)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점점이 수행을 하고 경을 읽고 있는 라마들이 많이 보인다. 달마가 면벽(面壁) 9년을 하면서 자신을 답답하게 옭아맨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런 답답한 곳도 좋은 수행 장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터 촛불이 비추는 어둡고 침침한 곳에는 세월이란 먼 길을 오체투지하면서 걸어온 과거가 느껴진다. 돌이 있는 바닥은 버터칠을 하고 있어서 비릿한 버터냄새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다.
포탈라궁은 라싸의 얼굴로 세계 7대불가사의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곳은 7세기 티베트를 통일한 손첸감보왕의 왕궁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이 언덕에서 라싸전역을 두루 내려다 볼 수 있는 왕궁으로는 최적지에 위치하고 있다. 17세기에 몽골의 후원을 받으며 동부에서 서부까지 통일국가로 평화를 누리던 5대 달라이라마가 먼저 9층짜리 건물인 백색 궁전을 세워 드레풍사원에서 포탈라궁으로 옮겨왔다. 그 후에 이 5대 달라이 라마는 붉은 궁전 축조를 준비하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의 섭정(攝政, Regent)인 상예 가초는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붉은 궁전 건축을 주도하여 12년에 걸쳐 완공했다. 이 때까지 달라이라마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5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은 붉은 건물이 완성되고 나서 붉은 궁전으로 옮겨져 새롭게 안치되었다고 한다.
백색 건축물이 일반적인 거주지라면 붉은 건축물은 종교적인 건물이라고 한다. 살아서는 하얀 집에서, 죽어서는 붉은 집에 안장된 5대 달라이라마는 포탈라궁의 건축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달라이라마의 위치는 종교적이지만 아주 정치적이어야 하는 직책이다. 포탈라궁은 달라이라마의 집무실이자 관저이고 정부가 있었던 곳이었다. 티베트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는 정교일치의 원시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이후 포탈라궁의 건축물들은 자가 번식을 하면서 필요에 따라서 부속 건축물들이 추가로 지어졌다. 학교, 명상센터, 무덤 등등 미로 같은 길과 수없이 많은 방으로 구성되어있다. 14대 달라이라마는 겨울이 아니면 이런 복잡하고 답답한 곳을 떠나 밝고 경관이 좋은 노불링카궁에서 지내던 즐거움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이번 사태를 주도한 사람들은 티베트 동부의 캄파족들이다. 이들은 달라이라마를 숭배하며 오체투지(五體投地) 순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다. 티베트 동부는 다른 곳보다 강수량이 많아 농경지와 초원이 많고 유목민들도 많다. 이들은 용맹하고 부유하며 다혈질로 알려져 있다.
마오쩌뚱의 10대 홍위병들의 야만적 행동에 의해 파괴될 때 포탈라 궁과 조캉사원이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쩌우언라이(주은래)가 자신의 군대로 호위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오보다는 쩌우가 더 인간적이고 문화적 식견이 더 있었던 것 같다. 66년부터 69년까지 3년에 걸친 어린 홍위병들의 비이성적이고 무분별한 난동(문화대혁명)은 통제불능이 되어 마오는 그 이름도 거창한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1000만에 이르던 홍위병을 해산시켰다.

홍위병들은 ‘문화’라는 말을 가장 모독한 자들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기존의 전통을 말살했던 야만의 표상이었다. 이들이 보인 야만과 무지의 세계는 이루 형용키 어렵다. 1966년 6천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불교경전은 불태워지고 화장실 휴지가 되었다. 가장 신성시하는 조캉 사원의 일부를 돼지우리로 만들었다.
지하의 Mao여! 사회주의 낙원을 꿈꾸던 전사들이 恣行한 만세의 惡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은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다’고 규정했다. <계속>

김규만
서울 은평구 굿모닝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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