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열 칼럼] 한의학 고유의 의료문화를 회복하고 발전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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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열 칼럼] 한의학 고유의 의료문화를 회복하고 발전시키자
  • 승인 2008.02.2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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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의료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이야기할 때 대표적인 모델로 등장하는 것이 영국과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다.
NHS(National Health Service)라고 부르는 영국 의료 시스템은 ‘무상 의료’의 대표 모델이다. 모든 국민들은 일차 의료 기관인 클리닉이나 Surgery에 등록(일종의 주치의 등록제)해야 하고, 이 일차 의료 기관에서 진료의뢰서를 발급 받아 상위의 종합병원으로 간다.
모든 의료비는 국가에서 걷은 세금으로 충당되며, 국민들은 병원을 이용할 때 별도의 진료비를 부담하지 않는다. 이 제도는 국민의 건강을 일종의 공공재로 보는 사회주의적 가치에 기초한 의료제도다.

반면 미국에서는 65세 이상 노인과 저소득자, 장애인들만이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의료비 대부분을 지원하는 Medicare, Medicaid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을 제외한 일반 국민들은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보험회사들이 지정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의료 보험료도 만만치 않지만 진료 받을 때 마다 지출해야 하는 본인 부담금도 적지 않아 2007년 OECD 건강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1인당 연간 의료비 지출은 6,401 달러로 세계 1위다.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건강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의료 시스템은 그 나라가 기초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가치에 의해 좌우된다.

의사들의 진료에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린 페이어가 쓴 ‘의학 과학인가 문화인가’(이미애 역, 몸과 마음, 2004)라는 책에는 같은 생의학(Biomedicine)에 기반하면서도 서양 각 나라의 의료가 얼마나 다른지 잘 묘사되어 있다. 린 페이어는 영국의 의학을 ‘경제적인 의학’으로, 미국의 의학을 ‘공격적인 의학’으로 규정한다. 필자도 영국에서 경험한 사실이지만 영국 의사들은 대단히 소극적으로 진료한다. 감기로 의사를 찾은 환자들에게 항생제나 전문의약품을 처방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파라세타몰’이라는 일반 의약품에 속하는 해열진통제를 슈퍼에서 사서 먹거나 민간요법을 써 보기를 권유하는 것으로 끝이다. 환자는 웬만한 감기쯤은 견뎌내야 한다.

반면 미국의 의사들은 내원한 환자들에게 무엇인가를 하고 보며, 병의 원인을 바이러스와 같은 몸 밖의 원인에서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린 페이어는 지적한다. 이런 의사들의 진료 패턴 차이는 그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병이나 건강에 대한 인식과 가치 등 의료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같은 의학 지식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각 나라마다 다른 의료 제도를 갖추고 있고, 또 의사들의 진료와 질병 해석이 서로 다른 패턴을 보인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것은 학문으로서의 의학은 과학일지 모르지만 의학과 의술을 실천하는 의료 현장에는 과학 외의 요소들이 많이 개입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오히려 의술과 의료 영역에서는 한 나라나 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

한국의 서양의학은 유럽 보다는 미국적인 의료문화에 훨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의사들의 진료가 대단히 공격적이고, 상업적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의 한의사들도 이와 같은 미국적 의료문화에 점차 동화되고 있다. 동시에 한의학과 함께 이어져 내려 왔고, 한의학과 동일시되었던 한의학 고유의 의료문화는 한의학의 과학화,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한의사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병을 앓는 환자보다는 질병 그 자체에 매몰되고, 질병에 대해 공격적으로 접근하는 미국적 의료문화에 빠져있는 한의사가 진정한 의미의 한의사일 수 있을까?
한의학과 함께 호흡했고, 한의학을 한의학이게 했던 한의학 고유의 의료문화, 이것을 되살리는 것이 미래 한의학 경쟁력의 원천을 가꾸는 일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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