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해방 후 한의사 제도 성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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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해방 후 한의사 제도 성립 과정
  • 승인 2008.02.2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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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대 석사학위논문] 해방 후 한의사 제도 성립 과정
- 1951년 국민의료법 법안 제정을 중심으로 -

“국민 지지 못 받으면 외면 받는 게 역사의 교훈”

한국 사회에서 한의사의 위치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생의학에 기반을 둔 서양의학만이 정통의학으로서 인정받고 있는 현실과 달리, 한국에서는 서양의학과 함께 전통적인 한의학이 국가의 공식 의료 체계 안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의사의 면허수준 또한 한의와 양의가 같은 수준으로 그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처음으로 한의와 양의가 같은 의사로서 함께 공존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1951년 『國民醫療法』 제정 과정을 살펴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만들어진 국민의료법이 이후 한국의 의료 제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그 곳에서부터 한국 의료제도의 발전 방향이 결정되어 현재 의료제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 법 제정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해방 후 국가의 미래 의료 체계를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첫 번째 시도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1951년 국민의료법 제정 과정을 통해 그 당시 우리 민족이 한의와 한의학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본 연구에서는 1951년 제2대 국회 본회의 국민의료법안 심사 과정 및 본회의 토론을 통해 해방 후 한의사 제도의 성립과정을 살펴보았다.

■ 열악한 환경에서 한의사제도 탄생

해방 후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은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미 군정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일반 대중의 실질적인 의료를 담당했던 것은 한의와 한약이었다.
건국 후 일제 시대인 1944년에 제정된 『朝鮮醫療令』을 대체할 새로운 의료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51년 제2대 국회에서 국민의료법 제정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양의 출신인 한국원 의원이 중심이 되어 한국원 외 83인의 국민의료법 원안이 제출되었고 해당 분과 위원회 수정안들, 보건부 수정안, 국회의원들의 수정안 및 발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제2대 국회 본회의에서는 모두 ‘漢醫’ 제도가 포함된 법안들이 상정되었다. 이미 사회적으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한의에 대한 지지가 높았으며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국가의료체계로부터 한의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1대 국회에서 한의를 배제한 보건부 안이 여론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 실패했던 경험도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우세했던 한의사 옹호론

그러나 한의사와 진료기관의 명칭, 한의사의 자격 및 면허 수준에 관한 부분은 의견이 다양하였다. 가장 중요했던 논쟁의 초점은 의료인으로서 한의사의 자격 수준을 설정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회 본회의 토론은 한의와 양의를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하자는 측과 한의를 양의보다 낮은 의료인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양측으로 나뉘었다.
토론의 내용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한의를 옹호하는 입장이 그 반대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의 출신 국회의원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한의를 옹호하는 측을 설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의측은 적절한 설득의 논리를 펼 수 없었다.

이는 열악한 의료 현실, 한의에 대한 대중의 확고한 지지, 값싸고 접근성 높은 한약의 존재, 한국 전쟁으로 인한 부족한 의료 자원 등의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의에 대한 반대는 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국회에서의 논의가 어느 한 면이 아닌 역사적·사회적·경제적 측면, 학문적 특성, 미래 의료 제도 등 여러 면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복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로 한의사 제도가 탄생했다는 점일 것이다.

1951년 통과된 국민의료법은 실질적으로 한의와 양의가 동등한 권한과 의무를 가지는 이원화 의료제도라 할 수 있다. 건국 후 최초로 만들어진 국민의료법이 이원화 제도를 담고 있다는 것은 건국 이후 한의와 양의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전 시대인 일제시대 ‘醫生’으로서 양의보다 낮은 수준의 의료인으로 차별받았던 상황과 일제시대 이래 제도권 내에서 소외되었던 현실과 같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한의사가 의사로서 인정받았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1951년은 결코 유리한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한의와 달리 양의의 경우 양의 출신 국회의원이 있었으며, 당시 보건부 장관을 비롯한 관련 부서에 양의 출신의 공무원들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한의학이 오랜 기간 국민 보건 향상에 기여해왔고 열악한 의료 현실 속에서 한의학의 효용성이 대중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이에 따라 한의학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확고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당시 관련 신문 기사와 국회 속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 “국민기대 속에 출발한 한의사제도, 부응 못하면 외면 받을 수도”

당시 관련 신문 기사와 국회 속기록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한의학에 대한 일반 대중의 신뢰와 기대였다. 한의가 한의학을 발전시켜 국민 보건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며 당시 국회는 한의에게 양의와 동일한 권한과 의무를 부여했던 것이다. 1951년 대한민국은 양의와 함께 한의를 미래 의료의 주역으로 선택하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당시 국회의원들의 의도와 국민의 지지만큼 한의사들이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가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한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에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그리고 진료 현장에서 얼마나 더 높은 수준의 진료로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민들이 원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다. 과거에 선택 받았듯이 만약 한의가 그러한 기대에 지속적으로 부응하지 못한다면 또한 국민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기용
경원대 한의대 생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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