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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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 승인 2008.01.25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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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딸들이 완성한 고려 말 역사!

지리했던 몽고와의 전쟁이 패배로 끝나고 고려에서는 왕자를 볼모로 보내게 되니 제일 먼저 보내졌던 인물이 고려 원종(元宗)의 세자 왕심(王諶)이었다. 그는 이미 고려에서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었던 서른아홉 살의 기혼남이었으나, 자기보다 스물네 살이나 적은 열여섯 살의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공주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당시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 황제 홀필렬(忽必烈;쿠빌라이, Khubilai )의 사위가 되었다. 곧이어 두 달 뒤에 충렬왕으로 보위에 오르니 이 땅의 첫 왕실간의 국제결혼이 이루어진 셈이다.

우리에겐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와의 결혼으로 실제적인 정치적 독립성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으니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고려로서는 심각한 주권 훼손이었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로는 이때에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제국의 선진문명을 아무런 제한없이 전면적으로 접할 수 있었고, 이제현(李齊賢)과 같은 학자는 원나라 수도에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이라는 개인연구소를 통해 세계 최고수준의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일급학자들이 거듭 태어나 최해(崔瀣), 이곡(李穀), 이색(李穡) 등의 고려인들은 원나라 과거에 합격하여 우수한 인재로 그곳 관리로 근무할 정도였다. 이러한 원나라의 사위국으로서의 특혜로 문화적 수용이 용이하였기에, 조선 건국의 이념의 바탕이 되었던 성리학이 도입된 것도 이때였으니, 양국의 결합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간 이렇게 홀도로게리미실 공주를 배행(陪行)하고 들어온 이들 가운데 양기(楊起)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나라의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이었던 그는 공주를 모시기 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아예 고려인으로 귀화하였으니, 청주양씨의 가문의 시작이 이로부터 있게 된 것이다. 그를 눈여겨봐야 할 점은 바로 우리 의학사(醫學史)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양예수(楊禮壽)의 9대조이기 때문이다. 즉, 지난 도서비평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서 언급한 양예수는 귀화인 양기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이 땅에 들어온 청주양씨는 고려와 조선을 이어 가문을 빛내었으니 상당백(上堂伯)에 봉해졌던 양기를 비롯하여,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들어와 영풍군(永豊君)의 어머니이면서도 정성을 다해 원손을 섬겼던 혜빈양씨(惠嬪楊氏)가 그러하며, 석봉(石峰)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명필로 이름을 날린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또한 양기의 후손이다. 그밖에도 여러 사람이 있지만, 이렇듯 가문의 기질을 받은 양예수와 같은 훌륭한 의관(醫官)이 있어 조선 중기의 『의림촬요(醫林撮要)』와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탄생하였으니, 이 땅에 민족의학(民族醫學)의 중흥을 일구어 놓는 초석이 된 것이다.

그밖에도 충선왕비 보탑실련과 역련진팔라, 충숙왕비 백안홀도, 충혜왕비 역련진반, 공민왕비 보탑실리 등에 대해서도 이 책은 재미있게 꾸미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련진팔라 공주의 사망원인에 대해 조사를 나왔던 원나라의 조사관들이 당시에 과연 왕여(王與)가 지은 『무원록(無寃錄)』이 쓰였는지 하는 점이다. 당시의 히트작이었던 법의학서(法醫學書)이니 개인적으로 은근히 기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값 9천9백원>

김홍균
서울 광진구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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