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9] 方周赫(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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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9] 方周赫(1879~?)
  • 승인 2007.09.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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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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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醫醫國을 몸소 실천한 한의사 독립운동가

어렵게 헌책방에서 구입한 1961년판 『醫林』誌 31호를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醫林』은 1954년에 창간호가 나온 이후로 오랜 기간 한의계의 정론지로 자리잡아 오던 대표적 잡지였는데, 2006년 겨울에 마지막 호가 나온 후에 재정난으로 간행이 중단되고 말았던 안타까운 잡지이다.

필자 본인도 수년간 『醫林』에 “한의학 역사 여행”과 “한의학 역사 속의 자료”이라는 고정 코너를 배정 받아 계속해서 글을 게재하여 왔던 터라 이 잡지의 간행중단은 한 달에 한번씩 만나온 벗을 잃은 듯한 슬픈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매달 말일 쯤 되면 『醫林』의 원고마감으로 습관적으로 긴장했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필자가 구입한 1961년도판 『醫林』이 나왔던 시기에는 아직 韓醫新聞도 나오지 않았고 『대한한의학회지』가 나오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이 잡지는 한의계의 동향을 전달하는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31호에는 裵元植, 李殷八, 李鍾海, 朴盛洙, 廉泰煥 등 당시 한의계 학술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의 글이 실려 있었다.

이 31호의 뒷부분을 훑어보다가 우연히 “우리나라의 元老大家를 찾아서”라는 소개의 글에서 “方周赫”이라는 인물을 접하게 되었다.
이 글의 앞부분에는 方周赫을 고딕체의 글씨로 “無言中에 行하고 行한 後에 名譽와 榮華의 代價를 바라지 않는 醫家政治人이며 愛國鬪士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醫家政治人”과 “愛國鬪士”는 그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왜 “醫家政治人”인가는 동아일보 1949년 10월 22일자 기사에 나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기록에서 그가 金孝錫, 尹潽善, 許政, 張基永, 金度演, 白象奎, 尹炳晧, 金始顯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의 고문으로 추대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민주국민당은 1949년에 한국독립당 계열인 대한국민회의의 申翼熙, 대동청년단의 池靑天, 그리고 金性洙, 白南薰 등을 초대 최고위원으로 하여 창당한 정당이었다.

호가 松雲인 方周赫은 慶南 陜川 태생으로서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醫家의 家門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친은 희대에 이름을 떨친 名醫로서, 가문의 전통을 이어 “周流天下大歡迎, 興國興家勢不輕”이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기고 전통의학자의 길에 들어섰다.
22세까지 四書三經과 醫書를 완전히 修學한 후에 서울로 와서 의술을 펼치게 되었고, 구한말 28세가 되던 해에는 社稷參奉이란 벼슬에 취임하였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보아온 李裕承 判書의 추천으로 侍從官으로 내정되게 되는데, 그 사이 韓日合邦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는 宮中에서 고종의 형인 雲峴宮 興親王 李熹의 侍醫로 있으면서 李熹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韓日合邦 이후에 만나 같이 아무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되돌아 왔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韓日合邦 이후에는 민족독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3.1운동 시기에 천도교의 창립자이면서 이 운동을 주도한 손병희가 찾아와 3.1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천도교와 시천교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에 활약을 하기도 하였고, 건국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던 李始榮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도시에서 밀정을 보냈을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자금을 주저없이 기탁하였다고 한다.

46세 이후에는 중국의 망명정부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코자 자진해서 중국에 수차례에 걸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찰되기도 하였다.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이보다 못한 집에 기거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해방 후 方周赫은 정치인으로서 뿐 아니라 한의사로서 의미있는 일들에 참여한다. 한의과대학의 설립과 한의사제도의 창립을 위한 활동이 그것이다.
1947년 행림학원이 만들어질 때 이사로 활동하여 한의과대학의 설립에 노력을 기울였고,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이 대학은 나중에 동양의약대학을 거쳐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부산피난시절인 1951년에는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金永勳, 朴鎬豊, 朴性洙 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하여 이를 관철해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그는 서울시 화동 경기중학교 옆에 慈道韓醫院을 개원하여 진료를 하였다. 1961년에 나온 『醫林』에는 方周赫이 8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아침 일찍부터 진료를 시작하여 저녁 9시까지 이어지는 진료에도 피곤한 기색이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후배 한의사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이력으로 인하여 그는 대한한의사협회가 만들어진 후에 고문으로 추대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金南一(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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