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열 칼럼] 지금의 한의학 위기, 그 본질은 정체성 혼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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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열 칼럼] 지금의 한의학 위기, 그 본질은 정체성 혼란이다
  • 승인 2007.09.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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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의학, 한의계 위기론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한약재의 질 관리에 실패한 데다, 한의학 영역을 위협하고 위축시킬 정도로 공격적인 서양의학 진영의 압박에 밀려 개원가의 한의원 경영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탓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은 문제의 성격상 시간 문제였을 뿐 언젠가는 겪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한약재의 엄격한 관리나 제형 문제는 급속하게 선진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높아진 기대 수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침을 둘러싼 서양의학 진영과의 갈등 또한 한의계와 서양의학계 모두가 새로운 치료 아이템을 창출해서 자신의 영역을 경쟁적으로 확대해나가는 지금과 같은 상업적 의료 상황에서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이 급박하다고해서 개별적인 사건에만 시선을 빼앗겨 문제의 배경이 되는 중요한 맥락을 놓쳐서는 안 된다. 邪氣의 침범에는 반드시 正氣虛라는 유인이 있듯이 이런 상황을 초래한 데는 반드시 우리의 문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정체성 혼란이다.

정체성(identity)은 어떤 개체나 집단이 자신을 다른 개체, 집단과 대립시켜 비교하고, 이 과정에서 인식되는 여러 가지 차이들, 특히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들과 관념들(ideas)에 주목하고 이것을 강조함으로써 자를 타와 구별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따라서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본래 모습이나 특성을 회복하여 바로 잡는다는 것이고,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자기의 본래 모습이나 특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며, 정체성 위기란 자신의 본모습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또 정체성 혼란은 자신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해 나타나는 자와 타의 혼동을 의미한다.

한의학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긴 역사 동안 한의학 학문 범주 내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과 임상기술, 그리고 때로는 작은 분야들이 생겨나고 없어졌으며, 외부로부터 새로운 것이 유입되었다.
특히 서로 인접해 있는 한국, 중국, 일본은 의학 이론과 임상기술면에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근현대시기에 접어들어 한의학의 현대화, 과학화가 진행되면서 ‘근대’라는 기준에 합당한 체계로 한의학이 새롭게 재편되었고, 이와 함께 서양의학적 지식이나 기술은 물론이고 보완대체의학 지식까지 한의학 범주 속으로 유입되어 한의학의 범위가 많이 확장되었다. 한의학이라는 학문 범주가 멈춰 서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한국 한의학에 대해 ‘한의학적’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근현대시기의 한의학, 한방 임상의 현대화, 과학화, 표준화 과정에서 서양의학의 강력한 세례를 받은 한의사들 스스로가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의사들은 그 동안 한의학 임상의 장점으로 거론되었던 인체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holistic approach), 변증논치, 병균이나 질병 보다는 환자에 초점을 맞추는 self-strengthening 의학, 양생의학, 생활의학과 같은 덕목들은 다 잊어버리고 질병을 대상으로 공격적으로 접근하는 서양의학 따라하기에 바쁘다.

한의학 연구자들도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가 의과대학, 약학대학에서 진행되는 연구들과 차별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한의학 연구를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최근 네트워크 한의원들의 부진도 어떤 전문가는 한의학적 특성을 고려하고 한의학적 컨텐츠를 확보함 없이, 양방 네트워크 병원 시스템을 무작정 모방하고 마케팅과 서비스에만 의존하려고 했던 전략이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자신의 장점을 의식하지도 발휘하지도 못하는 한의학과 한의사 집단이 외부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침 협회가 한의학의 정의에 대해 새롭게 고민한다고 하니 한의계의 컨센서스를 잘 모아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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