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7] 洪哲普(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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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7] 洪哲普(1853~?)
  • 승인 2007.06.2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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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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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무너진 후에도 충심으로 선왕 모신 典醫

『大韓帝國官員履歷書集』에 보면 특이한 이력을 가진 한의사 한명을 발견할 수 있다. 洪哲普가 바로 그이다.
이 이력서 모음집과 여타 자료를 참조하여 보면, 洪哲普는 철종 4년인 1853년에 태어나 1895년에 侍從院典醫司 典醫로 서임되고, 1897년 太醫院典醫가 되었다. 1898년에는 왕이 병들었을 때 別入直待令 醫官으로 공이 있어 熟馬 한 필을 하사받고 奏任官 5등으로 陞敍되었다.
1903년에는 內部衛生局長, 1904년에는 유행병예방의원, 1905년에는 태의원전의, 1907년 承寧府典醫가 되었고, 1909년에는 왕의 南巡에 동행하였고, 1911년에는 李王職典醫가 되었다. 1918년 12월 30일자 『朝鮮總督府官報』에 따르면 본인이 원해서 그해에 免官된 것으로 되어 있다.

■ 나이 마흔 셋에 侍從院典醫司 전의

이렇듯 洪哲普는 궁중에서 典醫로서, 조선의 멸망을 맞이한 비운의 한의사로서, 왕이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 자리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先王과 宮人들을 보필한 충성심과 자애심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1913년에 태왕전하를 진료한 기록이 나온다.
洪哲普는 서구열강들과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각축을 벌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典醫로 활동하면서 한의학이 몰락해가는 광경을 목도하였다.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양의사 알렌이 등용되고 그의 주장에 따라 惠民署, 活人署 등이 폐지되고 그 대신 廣惠院(후에 濟衆院)이라는 서양식 의료기관이 설립되면서 점차 한의학은 중심부로부터 밀려나 주변부의학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에 의해 의료제도를 서양식으로 변혁하게 되었고, 이것은 한의학이 제도권에서 소외되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 고종에 간청해 同濟醫學校 설립

한의학의 몰락은 민족전통학문의 몰락이라는 인식을 한 洪哲普는 1904년 張容駿, 金炳觀 등 宮中의 典醫들과 李應世, 姜弼周, 趙東浩 등 당시 명망 있었던 민간 한의사들과 의견을 같이 하여 大韓韓醫學校를 설립할 것을 高宗에게 간청하였다.
高宗은 이에 洪哲普의 간청을 받아들여 唐珠洞 奉常寺 南門골에 있는 內膽寺 官舍에 설립하도록 허가하였다.
이 학교의 이름은 同濟醫學校였고, 학생수는 40여명이었다. 洪哲普는 동료 典醫였던 張容駿, 李鶴浩 등과 함께 講師를 選定하는 考試官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考試方法은 面講(『內經』 『難經』) 背講(『醫學入門』 『東垣十書』 『丹溪心法』)이었다. 그러나 1907年 헤이그밀사사건으로 高宗이 강제 退位됨에 따라 同濟醫學校도 開校한지 3年만에 門을 닫고 말았다. (同濟醫學校 관련 내용은 표천근, 기창덕, 이종형 등의 연구 참조)

■ 1908년 大韓醫士會 조직

同濟醫學校의 폐교는 많은 한의사들에게 절망을 심어주었다. 洪哲普는 이에 한의사들의 부족한 세를 만회하여 학문의 부흥을 꾀하고자 한의사단체를 만들 것에 張容駿과 의기투합하여 1908년에 大韓醫士會를 조직하게 된다. 이 당시에 나온 大韓醫士總合所趣旨書란 제목의 발기문을 통해 당시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惟我醫家는 침침焉喚做長夢하고 不思講究하야 竟使醫道로 泯滅無傳하니 非但先聖之罪人이라 烏得免同胞之唾罵乎아 嗟我醫士는 奮發志氣하고 一體團合하야 闡明祖術과 拯濟生命으로 爲急務하야 忠告我 政府하고 學校也病阮也를 特立于我韓中央하고 邀邀處野明師하며 廣募在家靑年하야 函圖勉强하야 使斯道로 燦然復明하고 共亨醫國壽民之福을 千萬伏祝”

洪哲普는 同會의 회장이 되어 후배 한의사들의 회무수행을 지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大韓醫士會의 會長이 된 洪哲普는 폐교된 同濟醫學校를 이 會에서 맡기로 하고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 학교는 그의 노력에 의해 大韓醫學講習所 또는 講習院으로 改編되면서 韓醫敎育을 實施하여 왔다. 1910년에는 大韓醫士會가 任員會를 開催하고 漢城府의 韓醫師를 소집하여 東西醫學講習所를 만들게 되었다.

■ 東西醫學講習所도 설립

大韓醫士會는 한일합방 이후에는 朝鮮醫師硏鑽會라고 이름을 바꾸고 講習所를 계속 운용하였다. 당시 채택된 과목으로 『黃帝內經』, 『脈經』, 『醫學入門』, 『東醫寶鑑』, 『衛生學問答』 등이었다.
이렇듯 洪哲普는 典醫出身으로서 한일합방 이후에도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先王을 가까이에서 충성심을 가지고 모신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한의학 교육기관과 한의사단체를 만드는 일에 솔선수범하여 미래 한의학의 초석을 만든 우리 민족의 偉人인 것이다.

金南一(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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