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6] 朴鎬豊(1900~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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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6] 朴鎬豊(1900~1961)
  • 승인 2007.06.0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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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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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교육계의 귀감이 된 진정한 선비한의사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에, 한의사들은 36년 동안 왜곡된 한의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제일 시급했던 것은 한의사 단체의 설립이었다. 일제시대 동안 醫生이라는 명칭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설움을 받아온 그들은 한의학을 지키겠다는 일념에 날이 새는 줄 모르고 한의학 발전을 위한 노력의 나날을 계속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京畿道醫生會 간부들이 서울시내에 위치한 경기도의생회관에 모여 한의학의 발전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전국적 규모의 한의사단체의 결성이 논의되었고, 창립준비위원장에 金永勳이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한달 후에 ‘朝鮮醫士會’라는 한의사단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朝鮮醫士會의 회장에 당시에 명망 있었던 인물인 朴鎬豊이 추대된다. 1900년 서울에서 출생한 朴鎬豊은 호가 楠천으로 1916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 해부터 한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여 1941년부터 舊王宮의 典醫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전시대를 통해 그는 한의계의 대표인사로서 명망이 높았다.

해방과 더불어 그는 한의학을 살리는 방법은 교육을 진흥시키는 것이라고 여기고 교육계에 투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46년에 東洋醫學專門學校設立期成會에 京畿道의 醫生들을 대표하여 京畿道醫生會館을 기부하여 교육계에 헌신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탕이 되어 1948년에 한의학교육기관인 東洋大學館이 설립되게 되어 한의학은 발전가도를 걷게 되었다. 이 때 朴鎬豊은 초대 學館長을 맡게 되었고, 이 학교는 1951년에 서울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게 되고 이 때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947년에 한의학의 학술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東洋醫學會라는 학술단체가 결성되게 되었다. 朴鎬豊은 本會의 顧問으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東洋醫學會에서는 같은 해 12월에 『東洋醫學』이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는데, 한의학관련 논문과 단상, 임상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많은 후배들에게 학술을 독려하면서 귀감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한의사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에 한의학의 발전을 위한 어떤 방안도 무의미하였다. 1950년 2월에 보건부는 보건의료행정법안을 국회 문교사회위원회에 내놓았지만, 이 보건부안에는 의사, 치과의사만 의료인으로 포함시키고 한의사를 배제시키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국민들로부터 12만통의 반대진정서가 쇄도하였고, 국회의원 趙憲泳의 반대로 본 법안은 폐기되게 되었다. 같은 해에 한국전쟁 발발로 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지면서 1951년 1월 임시국회의사당이 마련되어 의정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때 朴鎬豊은 부산에 피난중이었고 같이 피난왔던 한의계 인사인 金永勳, 方周赫, 朴性洙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국회의원들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한의학에 대한 국회증언이 가능하게 되었고, 윤무상, 권의수, 이우룡, 정원희 등의 증언에 힘입어 한의사제도가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된 것이다.
한의사제도가 탄생된 후 한의사들은 정식으로 한의학을 바탕으로 한 진료행위와 학술활동을 보장받게 되었고, 이것은 당시 새로운 바람이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1955년에 『東洋醫藥』이라는 이름의 잡지가 간행되기 시작하는데, 朴鎬豊은 이 시기부터 학술적인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하기 시작한다.
同誌의 창간축사에서 그는 “오늘날 우리들이 要求하는 醫學이란 「理論을爲한 醫學이 아니요」 「人生을爲한 醫學이다」. 人體를 分割하여 個個의 性質과 個個의 作用을 究明한 生命機關說에 由來한 部分的醫學인 現代泰西醫學은 今日의 醫學이아니고 이미 昨日의 醫學이며 生體內에 作用하는 微妙複雜한 有機的 全體的法則을 觀察하여 生物의 全體性에 立脚한 全體醫學인 生物學的醫學이야말노 明日의 醫學이 아니고 正히 今日의 醫學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한의학의 미래를 진단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횟수를 거듭하면서 傷寒論과 診斷學에 대한 논문을 많이 발표하는데, 이것은 그의 학술사상의 바탕이 傷寒學說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동안 傷寒論을 중심으로 의학연구에 헌신하면서 『傷寒論講義』, 『醫經學講義』, 『急性熱性病』(Acute Febrile Disease라는 이름으로 英譯) 등 여러개의 저술을 남겼다.
특히 사후에 그의 遺稿를 모아 발간한 『楠천醫學大全』은 유명하다. 이 책은 그가 서거한지 10여년이 지난 1974년에 그의 아들이 遺稿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이 책에는 朴鍾和, 金長憲, 韓昇璉, 金晸壽, 朴熙緖 등의 서문이 실려 있어 그에 대한 학계의 두터운 신망을 느끼게 한다.

傷寒篇, 傳染病篇, 雜病篇, 産婦人科篇, 外科篇 등 모두 6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本草異名解說, 書名人名索引 등 附錄이 기록되어 있는 형식을 통해 이 책이 傷寒論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질환에 참고할 수 있는 종합의서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뛰어난 학술적 명망은 전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아 1956년 한국학술원회원으로 등록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60대 초반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그는 한의계의 조직을 위한 활동, 교육활동, 학술활동을 활발히 하여 후대의 귀감이 되었다.

김남일(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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