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3] 趙炳瑾(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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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3] 趙炳瑾(1868~?)
  • 승인 2007.03.0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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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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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학술진흥의 외길을 걸어간 선각자

1916년 每日申報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全朝鮮醫生會를 保安法 第1條에 의하여 解散을 命하고 全朝鮮醫生會 關係者 池錫永, 金性琪, 崔東燮, 景道學, 張起學, 尹用培, 全鳳, 韓秉璉, 趙炳瑾, 朴麟緖 等을 鍾路警察署로 招致하여 今後 다시는 이 같은 會를 設立하지 않겠다는 誓約書를 提出케 하다.”

이 기사는 매우 간략하지만 많은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여기에서 보안법은 무엇인가? 바로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악법이 아니던가. 일제 탄압의 아지트인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어떤 고초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연행된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을 것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일제시대 초기의 공포정치 시대로서 서슬이 퍼런 시대로 어떤 모임을 만들어 활동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우리는 이 기사 가운데에서 趙炳瑾이라는 한의사의 이름을 접하게 된다. 趙炳瑾의 개인 신상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에 대한 연대기적 연구는 불가능하다. 다만 일제시대에 간행된 몇몇 학술잡지에 나오는 그에 대한 간단한 행적과 부족하나마 존재하는 몇 개의 자필 논문을 통해 유추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1915년 최초의 한의사단체의 연합대회인 全鮮醫生大會를 열기 위해 발기인으로 참석하면서 10월 1일에 열린 발기인총회에서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23일에 大會가 열릴 때 “醫學과 生命”을 주제로 하는 개회사를 하여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全鮮醫會가 설립된 후에는 監事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16년에 간행된 『東醫報鑑』이라는 학술잡지 1호에서 “醫學과 生命의 關係”라는 글을 발표하여 전통의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東醫報鑑』이라는 학술잡지는 “학술기관지로서 한의들을 계몽시켜 한의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것”(崔東燮의 글), “편견을 고수하는 아집을 버리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의학본연의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힘쓰자.”(金允植의 發刊辭)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의학을 하는 이들을 계몽하고 한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특히, 이 잡지에는 “東醫學講述”, “西醫學講述” 등의 통신강의 형식의 글들을 시리즈의 형식을 빌려 싣고 있는데, 이것은 이 잡지가 한의사의 재교육을 또 다른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東醫報鑑』 2호에 나오는 講述師名簿에는 趙炳瑾의 이름이 池錫永에 이어 당당히 두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명부에 기록된 講述師는 당시 이름 석자만 들어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유명한 한의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池錫永, 趙炳瑾, 崔東燮, 洪鍾哲, 徐丙孝, 閔儀鎬, 李完珪, 田光玉, 金永勳, 張起學, 李喜豊, 朴麟緖, 林昌洙, 李峻奎, 徐丙琳, 高濟柏, 李祥源, 李承九, 張斗熙, 朴海鎭” 등이 그들이다.

한의학 관련 교육기관의 설립을 불허하는 일제의 정책은 한의사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한의사들은 일제의 교육기관 설립불허 정책에 저항하여 講習所 등을 설립하여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公認醫學講習所가 그것으로서, 본 講習所에서는 醫生이 되고자 하는 자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同 講習所에서는 또한 『東西醫學報』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여 교육프로그램을 운용하였다. 『東西醫學報』는 醫學講習所에서 강의된 내용을 수록하는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그 내용은 동서양의 의학을 망라하고 있는데, 분류하여 보면 ‘東醫學’, ‘參考科’, ‘西醫學’, ‘其他關聯內容’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잡지에서는 洪鍾哲, 李海盛, 趙炳瑾 3인이 醫學講習所의 설립을 발의하여 추진한 공적이 있는 인물로 꼽고 있다. 특히, 학생들이 공부할 때 사용하는 교과서와 종이류는 趙炳瑾의 개인사재로 충당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趙炳瑾은 同誌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이렇듯 사재를 털어 한의학교육에 매진하였다.

1917년까지 8호에 걸쳐 간행된 『東西醫學報』는 1918년 『朝鮮醫學界』라는 이름의 새로운 잡지로 거듭나게 된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한의학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는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어 계승되었다.
그는 『朝鮮醫學界』 1호에 “同業僉位에게謹告”라는 제목의 글에서 서양의학에 대해 “當人의所長을取하야我에短을補하며我의所長을施하야人의短을救하실지라”라고 하여 서양의학의 장점도 수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호에서는 일본 도야마시의 제약업계를 방문한 방문기를 싣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의약이 우수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방문이 아니라 조선의학의 필요성에 의해 갔던 탐방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趙炳瑾의 노력으로 醫學講習所의 운영은 정상궤도에 접어들게 되었고, 학술지의 간행도 순조롭게 진행되게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한의사들은 일제시대에 일제의 전통의학 탄압책으로 인해 낙후된 한의학을 되살리기 위해 東洋醫學會를 설립하고 1947년에는 『東洋醫學』이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였다. 趙炳瑾은 東洋醫學會에서 金永勳, 洪在호, 愼彩晟과 함께 名譽會長으로 추대되어 적극 활동하여 민족의학의 부흥에 노력하고 있다.
이렇듯 趙炳瑾은 학술잡지의 간행과 의학강습소의 운영을 통해 한의사들을 계몽하고자 힘썼던 선각자였던 것이다.

김남일(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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