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무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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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무서록
  • 승인 2007.01.2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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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문장력, 작문의 正道 안내해

1년 4계절 중 여러분은 언제를 제일 좋아하시나요? 저는 요즘 같은 봉장지절(封藏之節) 겨울을 최고로 친답니다. 무엇보다 큼지막한 호주머니가 달려있는 외투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깟 호주머니 있는 게 무슨 그리 대수냐고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겨울 외투에 달린 작지 않은 호주머니 덕택에, 따끈하고 구수한 군밤을 한 움큼 담을 수도 있고, 냉기 어린 연인의 가녀린 손을 녹여줄 수도 있으며, 게다가 이번에 소개드리는 이런 종류의 문고판 책을 많게는 6권까지도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요.

신영복 교수님의 ‘엽서’와 같이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 않지만, 저는 유달리 문고판 책을 선호합니다. 범우문고, 을유문고, 책세상문고, 전파과학사, 현대과학신서, 시공디스커버리, 동문선 등에서 나온 책들은 값도 저렴하거니와 정말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그만이거든요. 헌데 이 ‘무서록’의 저자이신 이태준 선생님도 저와 생각이 비슷하셨던 걸까요? 선생 역시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 안 된다. 가볍고 얄팍하고 뚜껑도 예전 능화지(菱華紙)처럼 부드러워 한 손에 말아 쥐고 누워서도 읽기 좋기를 탐낸다. 그러나 덮어놓으면 떠들리거나 구김살이 잡히지 않고 이내 고요히 제 태(態)로 돌아가는 인종(忍從)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까”라고 말씀하셨으니….

두서없이 기록한 글이라는 의미의 ‘무서록(無序錄)’은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님의 대표적인 수필집으로서, 한국 현대 수필사를 기록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隨筆)’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이름이 ‘피천득’ 선생님인 까닭은 상허 선생의 작품 어느 것 하나도 중고교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1930~1940년대 당시의 문단에서 선생의 뛰어난 문장력에 감탄하여 “산문은 이태준, 운문은 정지용”이라 평했을지라도, 선생은 이른바 ‘월북작가’인 탓에 해방 후 잊혀진 이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선생은 수필에 대해 “누구에게 있어서나 수필은 자기의 심적 나체(心的 裸體)다. 그러니까 수필을 쓰려면 먼저 ‘자기 풍부’가 있어야 하고 ‘자기의 미(美)’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이러한 정의는 글쓰기의 여러 분야 중 비단 수필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글이 곧 그 사람이다”는 말처럼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 제가 이렇게 잡문(雜文) 수준에 불과한 걸 쓴답시고 몇 시간째 낑낑대는 것만 봐도 - 절대 입으로 내뱉는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현 제도 상 반드시 논문을 써야만 되는 대학원생이나 전공의들은 이 ‘무서록’보다는 선생의 또 다른 저작 ‘문장강화(文章講話)’부터 먼저 읽고 또 익혀야 할 것 같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가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가치 있는 문장부터 소유해야 한다”는 상허 선생의 평소 지론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우선 글을 갈고 다듬는 방법부터 차근차근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작품 이전에 문장’이라는 글쓰기의 정도(正道)를, 저는 과연 언제쯤 터득할 수 있을까요?

안세영(경희대 한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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