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열 칼럼] ‘한의학’없는 한의학 연구와 임상을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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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열 칼럼] ‘한의학’없는 한의학 연구와 임상을 반성해야 한다
  • 승인 2007.01.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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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이란 과거와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를 모르면 현재나 미래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역사란 중요하다. 오늘과 같이 한의계가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힘든 때일수록 역사의식은 한의사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한의학의 개혁을 말한다. 하지만 만일 이들의 개혁 담론에서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역사인식이 빠져있다면 이들이 외치는 개혁은 아무 목적도 방향도 없는 공허한 구호가 될 뿐이다.

현대 한국 한의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키워드를 꼽는다면 현대화(modernize), 과학화(scientize), 표준화(standardize), 세계화(globalize) 같은 것들이다.
한의학의 현대화는 20세기 접어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현대화로도 번역되고, 근대화로도 번역되는 modernization은 합리주의, 실증주의,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특징지어지는 ‘근(현)대성(modernity)’ 개념을 기초로 한 것이다. 한의학의 현대화는 한의학을 합리적인(이성적인) 지식체계로 규정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규정은 역으로 한의학을 합리적인 지식체계로 재구성하는 작용을 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한의학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돌팔이들의 비정통 의술, 종교적, 주술적 치료법들은 퇴출되었고,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의학만이 한의학으로 남았다. 지금 대부분의 한의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의학은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형성된 합리적인 지식체계다. 한의학은 주술과 같은 비합리적인(비과학적인) 종교적 치료기술이나 이론적 백그라운드가 없는 민간요법과는 구분된다”라는 인식은 한의학의 현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한의학의 과학화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의학의 현대화와는 구분된다. 과학화는 현대화 보다 좁은 개념이다. 과학화의 핵심은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연구와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현상 설명에 있다. 한의학의 과학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1930년대 동서의학 논쟁에서도 한의학의 과학성은 중요한 토론 주제였다. 그 이후로 우리 선배들은 한의학이 과학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을 중요한 학문적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60년대 중반 한의학에 실험 연구가 도입되면서 한의학의 과학화는 본격화되었다. 지금의 EBM (evidence based medicine)에 기반한 한방 임상 연구도 과학화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의학의 표준화는 1972년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1차 개정 때 한의 질병 분류가 처음으로 제정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1984년 한방의료보험이 시범 실시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한의학의 제도권 진입과 정착에는 표준화가 필수적이다. 한의학 용어 표준화, 한방의료행위 표준화, 한방의료정보 표준화, 약재 표준화, 교육과정 표준화 등이 진행되었거나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한의학의 현대화, 과학화, 표준화는 이미 수십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한의학은 상당 부분 현대화, 과학화, 표준화 과정을 거치면서 취사선택되고 재창조(reinventing)된 것이다. 현대 한의학은 도제식 전통에서 가르쳐지고 텍스트 중심으로 이어지던 전통시대의 한의학과는 다르다.

아직도 과학화나 현대화, 표준화는 모든 한의학 개혁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논의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당위성을 강조하는 지점에서 끝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시점에서 우리가 좀 더 힘을 쏟아야할 것은 지금까지 진행돼 온 과학화나 현대화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반성을 토대로 앞으로 ‘한의학’의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과학화하고 현대화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이다.

지금 ‘한의학’ 없는 한의학의 과학화나 현대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의 한의학과 한방 임상에 대해 정체성 위기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화려한 마케팅 뒤에 감춰져 있는 한방 임상의 초라한 모습은 한의학적 컨텐츠의 빈곤이다. 한의학 R&D에서 보이는 아이디어의 천편일률성이나 서양의학 편향성, 한의학적 내용의 부실은 우려스러울 정도다.

부산대에서 들려오는 한의학 전문 대학원 교육과정과 관련된 불편한 소식도 역시 그동안 상대적으로 한의학 교육을 질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게을리 했던 기존의 한의과대학이 만들어낸 업보다. 한의학의 현대화나 과학화 대상이 되는 컨텐츠는 어디서 오는가? 전통 ‘한의학’에서 온다. 溫故而知新. 정말 상투적인 말이지만 溫故없이는 知新도 없다. 한의학이 살 길은 한의학적 컨텐츠에 있다. 우리가 전통 ‘한의학’을 계승하고 천착해야하는 이유다.

필자 E-mail : cylee@kyu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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