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열 칼럼] 지금 한의사들에게 ‘한의학’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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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열 칼럼] 지금 한의사들에게 ‘한의학’은 어떤 존재인가
  • 승인 2006.11.1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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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나의 은사이신 김완희 교수님은 새 학년 첫 시간에는 늘 ‘팥죽 할머니’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전래 동화인 이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선생님은 항상 우리 민족이 외세에 맞서 민족정신을 지켜왔듯이 한의학을 함에 있어서도 ‘우리’라는 주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끝맺음 하셨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그 나라만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의학이란 존재한 적이 없다. 흔히 학문과 사상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하듯 항상 밖으로부터는 다른 나라의 의학 사상이나 기술이 들어왔고 또 그 나라의 것은 밖으로 나갔다. 소위 ‘교류’라는 것이 인류역사에 있어 존재하지 않았던 곳이 없었고, 또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면 멀리는 인도나 아라비아 의학이 들어 왔고 가까이는 중국과 일본 의학이 들어 왔으며 최근에는 서양의학이 들어왔다. 반면에 우리나라 의학은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갔다.
비서구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의료인들은 한의학에 서양의학이나 과학이 도입되는 과정을 대부분 현대와 전통이라는 이분법 위에서 현대화(modernization) 과정의 일환으로 인식한다. 즉, 서양의학은 현대적, 과학적인 의학이고 한의학은 전근대적, 비과학적인 의학이라서 한의학을 현대화하기 위해서는 서양의학적 지식이나 과학적 방법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한의학과 서양의학, 한의학과 서양과학 사이의 교류를 너무 일방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우려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서양의 근대화주의자들이 동아시아 역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범했던 오류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전통-현대 이분법에 기초한 일방적인 현대화 담론을 이 시대의 많은 한의사들도 공유하고 있으며 스스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점점 강의실, 실험실, 진료실에서 전통적인 ‘한의학’은 마치 거추장스러운 옷처럼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가 되고 있다. 전통 ‘한의학’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한의학’의 고유한 특성을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주장조차도 일부 한의학 근본주의자들이나 보수, ‘수구꼴통’들의 주장으로 치부되고 있다. 지금처럼 ‘한의학’이 홀대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건 학문 간의 교류에는 반드시 협상(negotiation)의 과정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에서 일방적인 도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때로 무력을 앞세워 일방적인 도입이 강요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나라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이 생략된 적은 없었다.
즉, 하나의 의학사상이나 기술이 도입될 때는 반드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에서의 거부(rejection)나 수용(reception)과 같은 결정과정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수용의 주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다.
1970년대 말부터 ‘중의학’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수용주체로서의 ‘우리’를 망각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유물론 사상으로 개조되어 전통적인 중국의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중의학’을 속된 말로 아무 ‘개념’없이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다 못해 우리가 그 동안 사용해 왔던 한의학 용어나 글자까지도 다 내주었다. 자기 자신이 공산주의자이거나 유물론자가 아니면서 말이다.

이제 또 서양의학에 모든 것을 내주려하고 있다. 질병명은 단순히 질병의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 질병명은 질병 인식 체계와 뗄 수 없다.
한의학의 질병명은 우리 한의사의 사유체계다. 서양의학의 병명 체계를 표준으로 하겠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 한의사가 우리의 사유체계를 버리고 서양의 질병 인식 체계로 사고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그럼 ‘한의학’이 설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새삼 ‘팥죽 할머니’ 이야기를 해주신 은사님의 뜻을 되새기게 된다.

필자 E-mail : cylee@kyu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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