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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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2)
  • 승인 2005.10.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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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대한한의학원전학회장


■ 염제사(炎帝祠) ■

염제릉 관람을 마치고 위하(渭河)의 북쪽, 시정부의 맞은편에 있는 염제사(炎帝祠)로 향했다. 염제사는 1993년에 완공된 사당으로 입구에는 국무원 부총리 전기운(田紀雲)이 ‘炎帝故里’라고 쓴 큰 패방이 서 있다.
염제사라고 쓴 금색의 글자 아래에는 화하시조(華夏始祖·위 사진)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 입구 우측의 기둥에는 뇌사벽개천지혼돈(뇌사壁開天地混沌 ; 쟁기와 보습을 만들어 혼돈했던 천지의 문명을 열었고) 좌측에는 가화결출화하문명(嘉禾結出華夏文明 ; 아름다운 곡식 열매맺어 중화의 문명을 만들어 내었네)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

사당 내에 모셔져 있는 염제의 소상(塑像)은 높이가 5m로 중국 5천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곳의 염제상은 특이한데 머리에는 2개의 뿔이 솟아있고 몸에는 가죽옷을 걸치고 있는데 전설에 나오는 본래 염제의 모습이라고 한다. 뒷면 좌우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은 염제의 어머니가 염제를 낳는 모습이고 오른쪽 그림은 염제가 상백초(嘗百草)하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編註 [嘗=맛볼 상]

이곳에서는 매년 청명절과 염제의 탄신일인 음력 정월 11일, 기일(忌日)인 음력 7월7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기록에 나타난 염제의 제사는 춘추시대의 말에 나타난다. 사기의 봉선서(封禪書)를 보면 진(秦) 영공(靈公) 3년(B.C. 422년) 오산의 남쪽에 상치(上치)를 만들어 황제를 제사지내고 하치(下치)를 만들어 염제를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오산은 보계현 서북쪽의 신가진(新街鎭)에 있는데 이로부터 보더라도 신농에 대한 제사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編註 [치=제터 치]

■ 염제신농씨의 10대 발명 ■

<염제와 염제릉>의 저자 당군(唐群)은 염제신농씨의 10대 발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① 최초로 뇌사(뇌사 ; 쟁기와 보습)등의 농업 생산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 주역 계사전, 백호통(白虎通) 등 대부분의 책에 신농씨가 직접 쟁기와 보습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세본(世本)에서는 수작뇌사(垂作뇌사)라 하여 신농씨의 신하인 수(垂)가 쟁기와 보습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신농씨의 부족에서 뇌사를 처음 발명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② 농업을 처음으로 창시했다. 신농은 산에 불을 질러 농토를 만들어 곡식과 채소를 재배하여 식량을 안전하게 확보했는데 이러한 활동을 한 중심지는 한수(漢水)중류의 동백산(桐柏山)과 대홍산(大洪山)의 계곡으로 보고 있다. 신농이 농사를 지었다고 알려진 호북성 경산현(京山縣)의 굴가령문화(屈家嶺文化)와 내용이 대체로 비슷한 냉피아(冷皮아) 유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많은 벼의 껍질이 출토되었고 또 붉게 탄 흙속에 끼어져 있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냉피아 유지 시대는 염제신농씨의 시대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한다. 이로 보아 신농이 처음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는 법을 창시했다는 것은 매우 가능성이 있다.

③ 질그릇[陶器]을 만들었다. 인류발전사에 있어서 농작물의 재배와 제도술(制陶術)의 발명은 원시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창조로 문명의 시대로 진입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④ 방직업(紡織業)의 발명이다. 장자 도척편에서 “신농의 시대 때 농사를 지어 밥을 먹고 실을 짜서 옷을 해 입었다(神農之世에…… 耕而食하고 織而衣라)”고 하였다. 신농씨 시대에 흙을 구워 만든 방륜(紡輪)이 한수의 중류 또는 장강의 중류에서 대량 발견되고 있는데 당시에 방직업이 초보적으로 발전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⑤ 의약을 발명했다. 원시사회에 있어서 질병과 독사(毒蛇), 맹수의 피해는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 커다란 위협 중의 하나였다. 회남자의 수무훈(修務訓)을 보면 “신농은 백초를 맛보고 물이 달고 쓴 것을 맛보아 백성들이 가릴 줄을 알게 하였다. 이때에 하루에 70번 중독이 된 적도 있다. “(神農…… 嘗百草之滋味와 水泉之甘苦하야 令民知所避就라 當此之時하야 一日而遇七十毒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때 만들어진 첫번째 약물학 서적인 신농본초경은 신농으로써 그 명칭을 삼은 것이다.

⑥ 소금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세본·작(世本·作)》에서 “숙사가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다(宿沙作煮鹽)”라 하고 회남자 도응훈(道應訓)에서 “옛날 숙사의 백성이 모두 스스로 그 임금을 공격하고 신농에게 귀순하였다(昔宿沙之民이 皆自攻其君而歸神農이라)”고 하여 소금을 처음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이 신농에게 귀속된 숙사의 백성임을 밝히고 있다.

⑦ 금슬(琴瑟)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세본에서는 신농씨가 금(琴)과 슬(瑟)을 만들었다고 했고 환담(桓譚)의 신론(新論)에 신농씨에 대해 말하면서 “처음으로 오동나무를 깎아 금(琴)을 만들고 명주실로 현(弦)을 만들어 신명의 덕을 통했고 천지의 조화에 합하였다(始削桐爲琴하고 練絲爲弦하야 以通神明之德하고 合天地之和焉이라)”고 하였다. 선진시대 때 비파(瑟)를 연주하는 풍속은 초나라가 가장 왕성했고 초나라는 신농이 활동했던 열산(烈山)이 위치하므로 상호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⑧ 염제신농은 지역 관념을 두고 비로소 지형(地形)을 정립하여 천하의 방위를 식별하여 고찰하였다. 제왕세기에서 “천지가 열린 이래로 경계(經界)의 제도가 없었다. 삼황(三皇)은 오래전 사람이고 여러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농이 천하를 둠에 땅이 동서가 90만리이고 남북이 85만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리관념은 혈연관계가 느슨해지면서 지역관념이 점차 강해지는 표현으로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이다.

⑨ 원시천문학과 역법을 창립하였다. 농업의 발전은 천문학·역법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농씨는 일력(日曆)을 만들고 24절기를 바로잡고, 한서(寒暑)를 살피고, 8절(八節)을 확정하여 농사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냉피아(冷皮아) 신석기시대 유지에서 출토된 흙을 구워 만든 두병(豆柄 ; 제기의 손잡이) 위에 구멍을 뚫어 북두칠성과 흡사한 도안(圖案)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곳에 살았던 선민들의 천문학과 역법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⑩ 시장 제도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해가 떠올라 대낮이 되었을 때 시장을 열어 물물교환을 하게 한 것은 분업화 되어가는 사회에 있어서 필연적인 과정으로 사기 삼황본기, 주역 계사전 등에는 신농씨가 처음으로 시장의 제도를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곳 보계시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견된 북수령(北首嶺) 유물과 관도원(關桃園) 유물, 복림보(福臨堡) 유물 등은 염제 신농씨의 자취를 밝혀주는 중요한 실물자료라고 생각하고 있다.

염제사를 보고 나오니 시간이 좀 남는 듯 했다. 불현듯 보계현 경내에 있는 강태공이 낚시하던 조어대(釣魚臺)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이드에게 이야기를 하니 난색을 표명한다. 그러나 자꾸 떼를 쓰니 그도 마지못해 하면서 시간이 부족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안을 보지 못하면 겉만이라도 구경하고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 예정에는 없었던 강태공이 낚시하던 반계(磻溪)조어대로 차를 달렸다. 가이드는 차속에서 보계시의 정황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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