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빈딩성 한방진료 참가기 - 윤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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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빈딩성 한방진료 참가기 - 윤혜리
  • 승인 2005.04.0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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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그리운 남쪽 나라 베트남


참의료실현 청년한의사회는 반전평화운동의 일환으로 지난해 첫 베트남무료진료활동을 펼쳤다.
청한 소속 15명의 한의사 및 한의대생(한의진료단장 박용·경기 구리원진녹색병원)은 두 번째 진료활동으로 지난 3월 14~18일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빈딩성의 따이선현 의료센터와 따이빈사 보건소에서 한방무료진료를 실시, 2천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다음은 이번 활동에 참여한 청한 회원의 참가기이다.


윤 혜 리 (한의사·청한 회원)


한창 국시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올해도 3월에 베트남 의료봉사가 있는데 갈 생각있나?”
작년에 베트남 평화의료연대를 통해 의료봉사를 갔다온 이야기를 그 선배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지라 국시 후의 텅빈 일정에 제일 먼저 베트남 의료봉사를 채워 넣었다. 그렇게 베트남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3월 12일 토요일 저녁 8시 반 비행기를 타고 5시간을 날아 베트남 호치민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에서 눈을 붙이고, 다음날 아침부터 전쟁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은 수많은 사진과 증거 자료들로 채워져 있어서, 전쟁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베트남에서는 당시 미군의 지시를 받고 더럽고 궂은 일을 도맡아 했던 한국군들을 “따이한 군(대한 군)” 또는 “박정희 군대”라고 불렀다는데 “대한”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부끄러운 건 처음이었다.

그 어둡고 무거운 박물관에서 알게 된 이야기들 중 가슴 찡한 이야기는 어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쟁으로 아들 12형제를 모두 잃고서 베트콩 여전사로 총을 들고 싸우다가, 전쟁이 끝난 후 미군들의 시신이 무더기로 묻힌 곳을 찾아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면서 여생을 살고 계시다는 어머니. 전쟁이 나면 모든 군인들은 희생자라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오후에는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으로 싸우고 지금은 감독·작가로 활동하는 반례 선생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베트콩이라면 한국을 원수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우리를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놀라웠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와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는 베트남 사람들의 생각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975년 통일 이후 중앙당에서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잠시 잊고 모든 나라와 친구가 되자’라고 방향을 정했고 이제는 한국, 미국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나라와 수교를 맺고 있다.
그러나 학살이 있었던 마을마다 세워놓은 증오비와 위령비 그리고 학살을 기억하는 붉은 현수막은, 그들이 과거를 망각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미래의 발목을 잡지 말자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14일에는 호치민에서 퀴년으로 이동해, 통역학생들과 인사하고, 진료준비를 거쳐 진료는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진료환경은 모든 사람이 흡족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통역학생이 부족해서 의료진 한명당 한사람씩 붙을 수 없는 상황인데다, 한방은 약이 없이 준비된 침, 뜸, 부항 등으로 진료가 진행되었고, 특히 치과는 한국에 있을 때만큼 충분한 장비들을 준비하기 어려워서 많은 애로가 있었지만, 모든 선생님들께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진료를 해 주었다.

그곳에서는 노인의 상당수가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지난 전쟁 속에서 느꼈던 극도의 긴장과 공포감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어느 선생님의 얘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양부족이 있는지 비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른 체형이었는데 관절과 근육계통의 증상 호소가 많았다.

전쟁이 끝나고 10년쯤 지나자, 전쟁의 후유증과 계속되는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한 영양부족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평균신장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군살이 없는 베트남 사람들의 체형과, 베트남 여성이면 누가 입어도 아름다운 아오자이의 뒷면에 그런 아픔이 있을 줄이야.
베트남에도 한의사가 있고 한방치료가 행해지지만 이번 진료단이 들어간 마을에서는 한방치료를 받아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왜 허리가 아픈데 엉뚱한 데 침을 놓느냐, 침을 맞았는데 왜 아직도 아프냐 등등의 오해도 많이 있었지만 통역학생들이 그때그때마다 친절하게 설명해 드렸다.
진료를 받고 돌아나가면서 환자들이 미소를 띠고 “깜언”(고맙습니다)하며 손을 잡으면, 비행기 5시간의 거리와 전후 30년의 시공이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마음과 눈빛이 오고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우리의 진료활동을 통해 화해와 평화가 싹트고 베트남 사람들이 가슴의 상처를 씻을 수 있다면…’

넷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는 오전진료와 오후진료가 빡빡하게 진행되고 저녁마다 진료회의, 강연, 조별 족구대회 등 프로그램이 있고 저녁일정이 끝나면 그제서야 그날의 일들을 얘기하며 같이 온 치과선생님들, 한의사 선생님들, 그리고 베트남 통역학생들과의 즐거운 자리가 시작되었다.
그런 시간이면 노래가 빠지지 않았는데 우리가 노래 한자락을 하면 베트남 노래도 한자락이 나오고, 그러면 또 우리 노래로 받아주고 하는 모습들이 참 보기 좋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베트남에 함께 갔던 선생님들과 몇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다들 베트남을 그리워했다.
진료기간 내내 베트남어를 자제하고 거의 한국어만을 구사했던 그리고 사투리 때문에 고생한 학생들, 진료받으러 왔던 어르신들과 아이들, 훗훗했던 날씨와 쌀국수를 비롯한 베트남 음식들, 어느 선생님의 말씀마따나 나에게도 얼마간 베트남 열병이 쓸고 지나갈 듯 하다. 전쟁과 고엽제의 삭막함만을 떠올렸던 베트남이 이제는 따뜻함과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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