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134) 행복하지 않다면 다행입니다
상태바
[김영호 칼럼](134) 행복하지 않다면 다행입니다
  • 승인 2023.12.01 06: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호

김영호

doodis@hanmail.net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김영호
한의사

행복중독의 시대다. TV, 유튜브, 각종 SNS는 ‘당신 행복하지 않지?’ 혹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지?’라고 떠보는 듯 한 것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하면 손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며 행복에 중독된 이들의 지갑을 노린다. 쇼핑에서부터 여행, 더 나아가 빨리 은퇴하고 전 세계를 여행하라며 부추긴다. 그렇게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매일 행복해질까? 그 행복은 계속 지속될까?

야구선수는 타석에서 3할을 치면 아주 훌륭한 선수다. 그래서 10번 중 6,7번은 실패다. 축구선수는 더하다. 양 팀 22명의 선수가 90분의 경기 동안 교체를 당하지 않고 풀게임을 뛴다 해도 공을 다루는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95%의 시간 동안은 축구공도 없는 곳에서 쉴 새 없이 뛰어야 하는 것이 축구선수다.

인생에서도 ‘지금 아주 행복하다’고 느낄만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물질과 명예 모두를 가진 재벌, 정상급 연예인, 최고의 스포츠 선수들도 1년 365일, 24시간 내내 행복감을 느끼며 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일상적 부족함이 없는 그들은 우리보다 더 드물고 적은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오늘 하루 어제와 다를 바 없고 지루하며 큰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지극히 정상이고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불행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때는 하루 종일 불행의 원인이 사라지기만을 바라게 된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모색하거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가 지나간다. 불행의 시간 위를 지나고 있을 때 행복의 조건은 오직 불행의 소멸이다. 이 시기에는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반복되는 일상이 왜 이렇게 지루하지?’같은 생각이 떠오르기 어렵다.

 

하루가 지루하고,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것은 일상을 잠식할 만한 불행한 일이 현재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현재 불행의 원인(소송, 분쟁, 경제적 어려움, 병 등등)이 뚜렷하게 존재하고 그로 인해 내 일상이 큰 영향을 받고 있다면 불행의 원인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행복해진다. 불행의 원인이 사라지고 나면 안도감과 평안함을 느끼고 그것이 없다는 것만으로 행복감은 한 동안 이어진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불행했던 시간이 최근에 없었거나, 불행했던 기억이 오래되어 잊힌 상태 일 수 있다. 꼭 사라져야만 하는 불행이 내 일상에 없으니 더 큰 행복감을 갈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오늘 하루 반복된 일상으로 지루하고 행복하지 않았다면 일단 다행스러운 일이다.

매사에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가진 것에 매 순간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씩 비워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사해진다. 감사와 비움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로 이어진다. 그 이유를 설명해보겠다. 흰 종이를 한 장 준비해서 내가 가진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순서대로 써보자. 그리고 당장 없어도 되는 것부터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것까지 하나씩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며 지워보자. 아마 건강, 가족, 친구처럼 가장 위에 있는 것들을 지우려고 하면 눈물이 나서 쉽사리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바로 지루한 일상을 지탱해주며 다행스럽게 아직 내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이다. 이렇게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없어질 것처럼 비워내다 보면 감사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상당수는 누군가 간절히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이라는 생각까지 이어진다. 비움은 곧 감사고 감사는 곧 비움이 된다. 뚜렷한 불행이 없다는 것은 빚이나 대출이 없는 상태와 비슷하다. 누구나 많은 재산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빚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상태다.

출근길에 가파른 오르막이 있다. 간만에 아주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보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멀리 목적지를 쳐다보면 더 힘들어지고, 발끝을 보며 한걸음씩만 걷다보면 어느 새 끝이 눈앞에 와 있다는 점이다. 지금 지독한 불행을 통과하고 있는 분이든, 다행스럽게 지루한 일상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분이든 너무 먼 곳을 바라보면 지금이 고되다. 딱 한걸음, 오늘 하루만 살아가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 최대의 과제는 오늘, 그리고 바로 지금뿐이다. 먼 미래를 예습하라고도 하지 않았고 과거를 굳이 들추어 생생하게 복습하라고 보채는 사람도 없다. 눈을 발끝에 고정하고 그저 한 걸음씩만 걸어가면 된다. 그저 딱 한걸음 더 디딜 힘만 있으면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고 어느 새 비온 뒤 구름 걷히듯 맑은 날과 조우하게 된다. 불행(不幸)을 지나 무행(無幸:행복하지 않음)으로, 무행을 지나 행복(幸福)으로 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자 성장이다. 생각보다 우리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될, 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만으로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김영호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