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1073> - 『濟萬慈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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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1073> - 『濟萬慈航』
  • 승인 2023.09.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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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answer@kiom.re.kr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동의보감사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의보감사업단에서는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왔다. 최근기고: 고의서산책


고뇌의 바다에 빠진 가여운 衆生 

 이 책은 조선후기 민간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개인이 편집한 등초본 의서 가운데 하나이다. 제첨에는 예서체로 ‘濟萬慈航’이란 아름다운 서명이 적혀있다. 인본으로 간행된 적이 없고 자작 편집한 의서이기에 어떤 이유로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알아볼 수는 없다. 다만 이 책이 만인을 질고에서 구하기 위하여 마련된 의학서인 것을 감안한다면, 만병을 구제하기 위한 부처님의 손길 같은 지침서가 될 것으로 기원하였음이 분명하다.

  ‘慈航’이란 말은 자비의 항해라는 뜻으로 본디 불가에서 부처가 중생을 고뇌의 바다(苦海)에서 건져내기 위해 자비심으로 濟度하는 것을 일컫는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여기서 항해하는 배를 般若龍船이라 부르고 건너야 할 바다란 生死苦海를 말하며, 마침내 중생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바로 彼岸의 세계인 것이다.

 ◇ 『제만자항』

  그래서 『의방유취』첫머리 ‘大醫精誠’에서도 일찍이 당대 명의 손사막이 의사는 “먼저 大慈惻隱之心을 발휘하여 두루 생명을 지닌 사람의 고통(普救含靈之苦)을 구하겠다는 서원을 하고 귀천빈부나 長幼姸蚩, 怨親華夷를 따지지 말고 모두 내 부모 같이 한가지로 여겨(‘普同一等’) 주위의 눈치를 살피거나 자신의 몸을 먼저 돌보지 말고 힘껏 병자의 고통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말들은 본디 불교용어에서부터 비롯되었지만 참된 의료인의 자세를 지칭하거나 혹은 의학이 지향해야할 궁극적인 목표를 빗대어 말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비슷한 용례로 ‘普渡慈航’이나 ‘慈航普濟’란 표현이 의서에서 종종 보이곤 한다.

  서제에 어울리게 표지의 능화판에도 연화문을 여럿 아로새겨 아름답기 그지없다. 게다가 오랫동안 이 책에 거쳐 간 고인의 손길이 手澤으로 남아 소나무의 樹皮처럼 빙렬이 간 모습이 마침 보기 좋게 문양처럼 새겨졌다. 아쉽게도 서발이나 목록은 붙어 있지 않으나 본문에 앞서 육기의 속성과 오장육부의 오행배속, 오행의 상생상극에 관해 도식적으로 정리한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본문을 들춰보니, 권수에 ‘醫學入門抄’란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첫머리는 장부총론인데, 조선 후기의학을 점유했던 오장육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도를 가늠할 수 있는 의론이라 하겠다. 비록 원문을 등초한 사본이지만 오사란으로 계선을 친 다음, 10행 19자로 행열을 맞춰 기재했기에 가독성이 높은 편이다.

  판심은 별도로 그려져 있지 않은 채 공란으로 비워진 채로 남아 있다. 장부총론에 이어 장부조분, 관형찰색, 聽聲審音으로 항목이 이어지며, 원문이 그대로 옮겨져 있어 이 책이 가장 기본적인 의론에 집중한 입문자용으로 작성되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의학입문』에서 등출한 총론부가 끝나고 나서 다시 『동의보감』상한부가 채록되어 있다. 여기서부터는 계선이 보이지 않고 상한부의 내용을 가부 구절에 맞춰 2행으로 줄지어 기재해 놓았다. 권미에는 작성자 혹은 소장자의 것으로 보이는 필서기가 적혀있는데, 수록내용을 뜻하는 ‘장부총론상한부’란 명칭이 적혀있다.

  이와 함께 필서기에는 ‘解□堂主 金氏, 癸亥年正月五日始讀’이라고 적은 명문이 있다. 구체적인 실명이 담겨져 있지 않아 작성자 혹은 소장자의 정체를 추적하기 어렵겠지만 당호를 쓴 것으로 보아 의업을 전업한 인물보다는 향촌의 士族이거나 일가를 돌보기 위해 의약공부를 시작한 유의 지향 인사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표지나 지질 상태를 고려할 때 작성시기는 대략 1863년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약은 科宦의 길을 포기한 낙백한 지식인이라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동의보감사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의보감사업단에서는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왔다. 최근기고: 고의서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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