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하기](13) 유기농 인증마크를 따지지 않게 된 이유
상태바
[시골에서 인류학하기](13) 유기농 인증마크를 따지지 않게 된 이유
  • 승인 2023.06.16 05: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수박하우스에 놀러간 어린이

아이가 아토피로 고생을 심하게 했었다. 네 살 무렵에는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 약 1년 가량 온 가족이 통잠을 자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깨어서, 벅벅 긁어 피가 나는 아이 몸에 냉찜질을 하고 연고도 발라주다 보면 제대로 자지 못해 좀비 같은 몰골로 출근할 때가 태반이었다. 시골에 와서 목조주택을 짓고 살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토피 까페에 어떤 엄마가 ‘목조주택 지었더니 아이 아토피가 나았다’는 글을 올렸던 것이다. 고작 그런 글을 읽었다고 집을 짓는다니 얼척이 없긴 하다. 그러나 상상이 되겠지만, 1년 가까이 가수면 상태로 밤을 꼴딱 새다보면 시간을 두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만한 처지가 못 된다. 다행히 우리도 집을 짓고 나서 4개월쯤 지나자 신기하게 아이 아토피가 나았다. 집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집 짓느라 돈 많이 들었으니 그냥 기분이라도 좋도록 집 때문이라고 하자.

아무튼, 아토피 아이 보호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우리 가족도 친환경, 유기농 인증마크 붙어 있는 먹거리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걸 먹으면 아이 몸이 더 좋아지겠지, 아토피가 나을 거야 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물론 지금은 아이 피부가 좋아지기도 했지만) 시골에 와서 살면서 우리 가족은 그때와는 다른 이유로 유기농 인증을 따지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산책을 나갔다가, 우리 아이 볼 때마다 손주 생각나 이쁘다며 용돈 쥐어주시는 아랫마을 할아버지 부부가, 헤드랜턴 없이는 앞이 안 보이는 늦은 저녁까지 하우스에서 열무 솎아내고 수박 정식하시느라 등 굽어 일하시는 모습을 본 다음부터였다. 안 그래도 아이한테 수박을 깨끗하게 살 발라 먹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해왔지만, 그 모습을 본 이후로는 할아버지가 우리 마루에 들여다 놓고 가시는 수박 한 통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이건 그냥 8kg 짜리 수박이 아니라, 어디 마실도 안 나가고 새벽부터 밤까지 온종일 흙에다 파묻은 할아버지 내외의 인생이고 등골같아서 대충 질겅질겅 성의없게 먹다 버리면 정말 죄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할아버지 포함 우리 아랫마을 농사지으시는 이웃 대부분은 관행농업으로 수박, 열무, 배추, 무 등을 생산하신다. 관행농업이란 친환경 유기농업과는 달리,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여 재배하는 것인데, 근처 마을 이웃들이 유기농업 대신 관행농업을 하는 것은 꼭 트렌드를 모르고 촌스러워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유기농, 친환경 인증마크에는 인증을 위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데 이건 농부들이 각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물론 약 수십만 원의 인증 비용을 부담하더라도 좀 더 좋은 값에 대량으로 팔 수 있다면 계산이 선다. 하지만 옆 마을 두릅 농사짓는 아지매 말씀처럼, 한철에 300만 원어치 파는 두릅농사를 지으면서 해마다 수십만 원 인증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계산이 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유기농사는 품이 많이 든다. 남들은 농약 한 번 치면 될 일을 서너번 쳐야 하고, 제초제 대신 손으로 잡초를 일일이 뽑아야만 하는 노동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이야 철학을 가지고 어떻게든 해볼 만한 일일지 몰라도 칠순 넘은 어른들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수고로운 일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대농 정도라면 인건비 주고 사람을 부려 좀 더 편하게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한국 농촌 구조상 약 90%에 가까운 절대다수는 가족농 소농의 형태를 하고 있다. 대농의 경우에도 농촌에서 일할 사람 구하기 정말 어렵다는 객관적 사실을 고려해보면, 결국 농부들이 직접 몸으로 떼우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해 볼 만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유기농, 친환경 인증마크는 진짜 ‘노동집약적’인 무엇인 셈이다. 지금도 이미 늙었는데 점점 더 늙어가는 이웃들에게,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풀을 메고 친환경 약제통을 둘러멘 채 남들보다 더 여러 번 하우스를 오가는 수고를 해라, 그렇게 삭신을 갈아 넣고 인생을 갈아 넣어 그놈의 ‘유기농’ 먹거리를 만들어 내라(!)는 요구는 차마 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나마도 이 노인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유기농이든 아니든 간에 먹거리를 만들어 낼 사람이라도 있을지 알 수 없는 세상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친환경, 유기농 먹거리 소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가끔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애초에 한국에서 생협들을 주축으로 유기농 먹거리 소비하자는 운동은 농민과 도시 소비자, 자연 생태계가 함께 잘 어울려 살아보자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예전의 우리 가족이 그랬듯 - 농부의 삶에는 관심없이 - ‘나’와 ‘가족’의 건강만을 위해 유기농 농산물을 사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또 인증마크가 붙어 있는 먹거리를 소비하면서 중산층 이상의 소비자들이 스스로를 특별하고 우월하게 ‘구별짓기’하고 있다는 연구자들의 지적도 있다. 나조차 그런 소비자들 중 하나이니 남에게 입을 댈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이 지면을 빌어 부탁드리고 싶다. 인증마크 없고, 잘 포장된 농산물이 아니더라도, 작은 모종에서부터 그만큼을 키워내기 위해 오늘도 아랫마을 박 씨 할아버지가 새벽부터 밤까지 흙먼지 뒤집어쓰고 일하셨다고. 그러니 부디 유기농이 아니더라도 그 굽은 허리와 거칠어 갈라진 그 손가락 마디마디를 떠올리며 먹거리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주십사, 그렇게 대신 부탁드린다.

 

신유정 / 인류학 박사, 한의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