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224] 痘兒調査區別成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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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224] 痘兒調査區別成冊
  • 승인 2004.11.1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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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帝國 시절의 疫學調査

학술저작이나 경험방이 아니고 의약관련 문건에 해당하는 소책자이다. 다른 문서더미 속에서 섞여 나온지라 온전한 서책 형태를 이루지 못한 채 흩어진 낱장을 모아 종이끈으로 묶어놓은 상태이며, 서로 다른 두 지역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다.

첫 번째 문건의 표지에는 제목이 ‘銀洞面痘兒調査區別成冊’이라 하였고 丙午七月 日로 기록해 놓았다(사진 上). 두 번째 것은 그나마 표지가 잘려져 반쯤 달아난 채 ‘○○面小兒成冊’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다행히도 맨 마지막 장에 보고자가 甘山面掌으로 되어 있어 이것을 앞의 것과 연관지어보면 감산면의 痘兒調査冊임을 알 수 있다.

또 기록일자를 丙午七月七日로 좀 더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이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건에 기록된 지명이나 문건의 지질로 보아 아마도 이 병오년은 1906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해는 대한제국의 말기 고종황제 재위 10년(光武 10년)으로 이른바 을사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이 강탈된 이듬해에 해당한다. 또한 이 두 지역은 현재의 신태인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시 태인현에 속한 곳이었다.

기재 방식을 살펴보면, 일개 면의 洞里別로 나뉘어 조사되었는데 각 구역별로 主幹人이라 표시한 인물의 성명이 적혀 있다. 이것은 지역마다 책임자를 지정하여 계획적으로 조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같은 동리라도 지역의 넓고 좁음에 따라 統別로 세분해 놓았는데, 기본적으로 ‘已經痘’와 ‘未經痘’로 구분되어 있다. 조사대상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개 당년의 초생아이거나 한, 두 살 된 어린 애였는지 나이는 따로 기록하지 않았고 아이의 이름 역시 없다. 다만 아비의 성명 아래 子와 女로만 구분하여 기재하였다. 예컨대, 守約洞의 경우 主幹人權乃洪 그리고 第一統 李永彦 女, 安先京 女, 全治明 子는 今年生未經痘라고 표기하였다(사진 下). 이들의 자녀는 당년에 태어난 초생아로 아직 천연두를 앓지 않은 아이로 기록하고 있다.

이어지는 龜巖里의 경우, 主幹人金仁明이라 되어 있고 第二統에 金乃水 子, 鄭成仲 子, 王子三 子, 申元益 女, 朴京化 女 등 5명의 어린애는 ‘今年生未經痘’라 하였고 第三統을 보면 金治西 女, 金仁明 女, 李治凡 女, 李致九 子, 金乃興 子, 李京集 子는 ‘乙巳生已經痘’라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한 동네에서 돌이전의 아이 5명은 한살박이로 아직 천연두를 앓지 않았고 돌이 지난 어린애 6명은 이미 천연두를 앓았다는 것이니 실로 엄청난 이환율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거의 모든 어린 아이들이 한 돌을 고비로 두창을 앓게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개 이런 방식으로 첫째 권에는 水川里, 倉村, 杏亭, 漆田, 三里, 尺川, 內洞, 井洞, 梅堂 등 여러 고을의 15통에 달하는 구역을 조사한 결과가 집계되어 있는데, 앞서의 비율과 마찬가지로 이미 두창을 앓은 아이는 모두 42명으로 남자 아이 24명, 여자 아이 18명 그리고 아직 두창을 앓지 않은 애는 41명으로 남자 아이 21명, 여자 아이 20명으로 조사 대상 아이 수를 모두 합하면 83명이다.

둘째 권에는 기록 방식이 약간 다른 데, 里統戶의 구역 단위를 적고 일일이 家戶별로 조사하여 호주 성명을 적은 다음 그 아래 ‘子女○歲 혹은 子女年齡○’라고 적었다. 그러나 전체는 이미 두창을 앓은 아이(已經痘)부터 먼저 차례로 적고 그 다음 아직 두창을 앓지 않은 아이(未經痘), 그리고 初生兒로 나누어 기재하였다. 조사된 인원은 각각 32명, 15명, 22명으로 감산면의 조사 대상 어린이는 모두 69명이다. 앞의 은동면보다 숫자가 조금 적긴 하지만 이곳 역시 반수 가까운 아이들이 이미 두창을 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연두가 법정전염병에서 제외된 지도 오래 전의 일이 되었고 이제는 주위에서 두창을 앓았던 흔적을 찾아보기도 매우 어렵다. 그러나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전 인구의 태반이 겪어야 했던 무서운 질병이었으며 소아병의 대명사로 여길 정도였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지만 심각했던 역병의 당시 정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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