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 東武 公의 肖像
상태바
[이강재의 임상8체질] 東武 公의 肖像
  • 승인 2021.09.11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34

이현재

2007년 1월 9일에, 명지대학교에서 권도원 선생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행사가 열린 명지빌딩에 부산의 모 원장이 사진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물론 권도원 선생과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는 1999년 12월 16일에 부산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열렸던 강연에서도 권도원 선생과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선생과 찍은 사진을 어디에 쓰나, 물론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기 위함이다. 창시자와 찍은 사진이니,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표가 아닌가. 만약에 책을 낸다면 첫 장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할 것이 아닌가.

이현재(1903~1973) 선생은 근본적으로 장사꾼이다. 포목상인 흥일사를 경영하여 재산을 많이 모았다. 그러던 그가 1945년에 사상의약보급회를 창설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전에는 이북과의 왕래가 비교적 수월했던 때라, 동무 공의 생신일에 함흥을 방문하여 공의 묘소와 추모대(追思臺)에 참배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후학들을 만나고 자료를 필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현재 선생의 함흥 방문에는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의 추리다. 이현재 선생은 화공(畵工)을 불렀고, 생전의 동무 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동무 공의 초상(肖像)을 급히 완성한다. 왜 동무 공의 초상인가,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두기 위해서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그림의 제목은 ‘이동무(李東武) 선생 초상’이다. 그리고 초상 옆에 “公生於醫藥經驗五六千載後 因前人之述偶得四象人臟腑性理 著得一書名曰壽世保元 又著述格致藁”(공은 의약의 경험이 생긴 지 5,6천 년이 지난 후에 태어났다. 앞선 사람들의 저술에서 사상인의 장부 성리를 깨닫게 되어, 일서를 지어서 〈수세보원〉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격치고를 저술하였다.)라고 적어 넣었다. 이 문장은 『동의수세보원』의 「의원론」에 “余生於醫藥經驗~”으로 시작하는 문장에서 나 여를 공으로 바꾸고 뒷부분에 ‘又著述格致藁’를 추가한 것이다.

 『격치고』를 추가한 부분이, 그림에 이 문장이 적힌 시기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동무 공의 사후에 이때까지 유고(遺稿) 중에서 출간된 것은 수세보원과 격치고 두 책이었다. 한두정 선생이 함흥에서 『격치고』를 출간한 것이 1940년 7월 21일이다. 그러니 이 문장은 최소한 1940년 7월 21일 이후에 적혔을 것이란 추정이다.

 

한국전쟁 후에 다동(茶洞)에 있던 사상회관에서 열리던 사상의약보급회의 모임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사상의약보급회는 매년 동무 공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현재 선생은 신문에 행사광고와 기념기고를 하였다. 기고문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은 두 번이다. 1956년 11월 4일 동아일보에 ‘사상의학설이란’을 실었고, 1958년 5월 7일에는 ‘인간과 사상’을 썼다. 1956년 4월 27일자 조선일보에 동무 공의 초상이 신문지면에 처음으로 실렸다.

조선일보 기사 속의 사진 왼쪽에, 초상 속에 적어 넣은 문장 두 줄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니 저 사진은 사상회관의 이현재 선생 방 벽에 걸려 있던 초상을 찍은 것이 분명하다. 사상의학의 개조(開祖) 이동무 선생의 초상을 간직하고 있는 사상의약보급회가 동무 공의 탄신일 기념식과 강연회를 개최한다는 알림이다.

이현재 선생은 좀 엉뚱한 배짱이 있는 분이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흥일사가 있던 건물을 사상회관이라 명명하고 사상한의원이란 간판을 걸고서 진료활동을 했다. 시골 촌구석도 아니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그랬으니 보건당국의 단속을 자주 받을 수밖에는 없었다. 사회의 기존 제도나 질서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태양인이 가진 성향 중 하나이기는 하다.

 

염태환

염태환(1933~ ) 선생은 동양의대 6기 졸업으로 재학 기간은 1953년에서 1957년 사이일 것이다. 염동환(1942~ ) 염용환 두 동생도 경희대를 졸업하여 한의사 3형제였다. 이 형제들의 부친은, 양정고보 2학년 때인 1921년에 동아일보에 동시 ‘피꽃’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한 아동문학가 일장(一杖) 염근수(廉根守 1907~2003) 선생이다.

염태환 선생은 권도원 선생에게 배운, 공식적인 1호 제자라고 할 수 있다. 1965년에 동양의과대학이 경희대학교에 흡수 합병되고, 1968년 4월 대학원에 체질의학 전공이 개설되었을 때, 권도원 선생의 지도를 받고 석사과정을 했던 첫 번째 대학원생이다. 나는 미국 뉴욕시 플러싱에서 Dr. Yom's Acupuncture Clinic을 열고 있던 염태환 선생께, 2010년 4월 5일에 첫 서신을 보냈고 선생은 2010년 4월 13일부터 2013년 2월 21일까지 열 번 답장을 주셨다. 내가 드린 책의 답례로 선생의 저서인 『체질침진료제요』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내가 이현재 선생과 사상의약보급회 그리고 사상회관에 대해서 물었을 때, 이런 답장을 하셨다.

“나도 그 시절 이현재 선생의 사상한의원에 가끔 놀러가곤 했는데, 이 분은 100% 관형찰색의 망진 만으로 한열태소음양인을 가리고 있었고 ~ 나는 늘 이 집에 가면 탐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벽에 걸린 이제마 선생의 초상화였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른 후 내가 권 선생의 문하생이 된 후 권 선생께 세배를 가면 권 선생께서 나를 대동하고 이현재 선생께 세배를 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현재 선생은 해방 전에 남북왕래가 자유로울 때는 이제마 선생의 생신일이 되면 함흥을 방문하여 이제마 선생의 후학들을 만나보는 등 사상의약 연구에 열을 올리던 분이었다. 한열로 태소음양인을 구분하는 논의는 그때에 이제마 선생의 후학들에게서도 공유되는 논제였다고 생각하고 아마도 그분들에게서 그런 인식을 이어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홍순용 선생 같은 분은 이런 논의 자체를 반대하는 쪽에 있었다. 이현재 선생이 주장한 한열 태소음양인의 8형은 권도원 8체질의학의 원형이었다고 판단한다.’고 쓰셨다. 그리고 동무 공은 1837년 정유(丁酉)생이고, 홍순용 선생(己酉)과 권도원 선생(辛酉), 염태환 선생(癸酉)은 각각 12년 차이로 닭띠 띠동갑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윤완중

윤완중(尹完重) 선생은 1910년 7월 12일 황해도 금천군 태생이다. 향리에서 한학을 배웠다. 검정시험을 거쳐서 1959년 4월 15일에 시행된 제9회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여 한의사가 되었다.(면허번호:1,292호) 1962년 7월 9일에 창신동에 신일한의원을 개설하였다. 1970년 5월 27일에 창립한 대한사상의학회의 부회장을 맡았다.

 

사상의학회

 

이현재 선생이 이끌던 사상의약보급회는 1955년 8월에 등사판으로 『사상의서 동의수세보원』을 발행한다. 그리고 1957년 4월 30일에 사상의학회를 출범시켰다. 1959년 12월 16일에 등사본으로 『동의수세보원』을 행림서원을 통해서 발간한다. 여기에 이현재 선생이 가지고 있던 동무 공의 초상이 역대의 〈수세보원〉 판본 중에서 처음으로 실리게 된다.

 그리고 동일한 그림이 1963년 7월에 윤완중이 완성한 판본과, 윤완중이 발행권을 행림서원에 넘기고 나온 1963년 9월과 11월 판에 모두 실렸다. 또한 박석언이 보관하고 있던 7판본을 윤완중이 1972년 9월 30일에 초상을 추가하여 복사판 영인본으로 제작하는데, 이 판본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11월에 대한사상의학회를 발행소로 하여 배부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현재 선생의 1959년판부터 1972년판까지 똑같은 초상이 모두 다섯 번 〈수세보원〉 판본에 들어갔던 것이다. 뒤의 네 번은 모두 기본적으로 윤완중이 개입되어 있는데, 1963년 7월에 완성한 석판본의 발행권을 행림서원에 넘기게 된 연유는 아마도 초상을 사용한 문제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한다. 이 초상은 1996년에 동무 이제마가 문화체육부 1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이제마의 달’ 기념행사를 알리는 공식 포스터에도 쓰였다.

 

근래에 경희한의대 의사학교실인 김남일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가, 흥미로운 물건을 하나 보았다. 인쇄업계에서 부식판이라 부르는 동판이었다. 가로 5.2cm 세로 7cm로 놀랍게도 동무 이제마 공의 초상이 들어 있었다. 어디에 사용된 것인지 궁금해서 입수한 경위를 물으니, 노정우 선생의 유족인 따님 노효신 씨가 2019년에 기증한 노정우 선생의 유품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 편에 이어서 쓴다.)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