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212] 食療纂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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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212] 食療纂要
  • 승인 2004.07.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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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官 全循義의 화려한 復活

필자는 요즘 세종~성종 연간에 활약한 名醫 全循義(생몰년 미상)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고심하고 있다.
그는 「왕조실록」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조선 전기 의학계 名士 중 한 사람이며, 의관으로서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가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이 비천하고 의과출신이라는 이유로 당대에도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으며, 명성에 비하여 생애와 행적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특히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명의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문종의 승하로 이어진 의료과오의 책임을 물어 憲府와 諫院으로부터 끊임없이 重罪를 추궁 당했다.

그런 그가 요즘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때문이다. 몇 해 전 방영된 역사 특집프로그램에서 온실을 이용한 冬節養菜 재배법이 서양보다 앞서 동양에서 이용되었다고 소개된바 있는데, 이 내용이 기록된 「山家要錄」의 저자가 다름 아닌 醫官 전순의이다.

또 북한에서 조선 초기에 간행한 「鍼灸擇日編集」(144회, 뒤바뀐 조선의학의 運命 / 2003. 2. 17일자 참조)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지난 해 겨울에는 새로 발견된 「食療纂要」에 관한 서지학 논고가 발표되었다. 아울러 지방 방송에서는 그가 전라도 진안에서 世居한 전씨의 후예임이 족보를 통해 입증되었다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여하튼 몇 년 새를 두고 잇달아 그의 저술이 발견되고 사적이 드러남으로써, 「의방유취」를 비롯한 조선의학 문헌을 연구해온 필자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식료찬요』는 음식치료법을 다룬 전문서로는 현존 최고의 것이며,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서명과 서문의 일부만 기록으로 전할 뿐 잃어버린 서적으로 여겨졌었다.

이 책에 관한 기록으로 「왕조실록」 성종 18년(1487) 4월조를 보면, “右贊成 孫舜孝가 食療撰要를 바쳤는데, 이 책은 醫員 全循義가 지은 것으로 孫舜孝가 慶尙監司로 있을 적에 尙州에서 刊行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 崔世珍이 펴낸 字典 「訓蒙字會」에도 『食療纂要』를 인용하여 음식이름을 풀어 쓰고 있으나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좀 더 후대 문헌인 「海東文獻總錄」에는 “全循義가 『食醫心鑑』, 『食療本草』, 『補闕食療』, 『大全本草』 등의 방서를 뒤져 常用할 수 있는 간편하고 효과 좋은 食治處方을 가려 뽑아 ......”라고 밝혀놓았다.

또 주석에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飮食이 가장 으뜸이요 藥餌가 그 다음이다. 시기에 맞춰 風寒暑濕을 막아주고 飮食과 男女의 욕심을 절제한다면 병이 생길 수 있겠는가?...... 따라서 옛사람들은 먼저 식치요법을 처방하고 나서 듣지 않게 되면 그제 서야 藥으로 치료하였다.” 아울러 “...... 옛 선인들이 사람의 병을 다스리는데 반드시 食治를 우선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 책은 不分卷 1책으로 諸風一, 傷寒二, 心腹痛三 附脇痛으로부터 시작하여 小兒諸病, 驚癎까지 전체 45門으로 나누어져 있다.
목차의 구성이나 문별 분류 표기가 세조 때 펴낸 「구급방(언해)」과 닮아 있어 이 시기에 나온 것임을 짐작케 한다.

서문에는 ‘임금이 서명을 下賜하고 서문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말미의 명문에는 ‘天順四年庚辰 ...... 嘉靖大夫行龍양衛上護軍 臣全循義 拜手稽首謹序’라고 밝히고 있으니, 세조 재위 6년째인 1460년에 작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서명을 하사 받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의관 신분인 전순의가 직접 책을 쓰고 서문까지 지었다는 사실은 보기 드문 예이다.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행적과 내용 가운데 미심쩍은 부분은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042)868-9442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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