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협 창립50주년 기념특집(1) - 외연의 확장과 내포적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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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협 창립50주년 기념특집(1) - 외연의 확장과 내포적 발전
  • 승인 2004.03.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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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권 의료로서의 끊임없는 진입투쟁
한방의보 등 시행불구 사적의료 벗어나지 못해

사진설명-1952년 12월 10일에 열린 대한한의사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임원과 대의원들.

연재순서
1) 외연의 확장과 내포적 발전
2) 갈등과 대응
3) 한의협 조직의 발전과 한계
4) 세계로 미래로 가기 위한 조건

오는 12월 16일은 일제의 한의학 말살정책으로 의료인의 자격을 상실했던 한의학이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대한한의사협회를 창립한 지 50주년 되는 날이다. 반세기동안이 변화의 양상을 추적, 조명하는 일은 오늘을 사는 한의학의 후예로서 마땅히 해야 될 역사적 사명이다. 침구사제도 도입을 위한 의료법개정안으로 또다시 기로에 선 이 시점에서 한의협사를 되짚어봄으로써 미래 한의학의 발전방향을 예측해 볼 수 있도록 노력했다. 방대한 역사를 수회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독자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편집자 주)

힘겨운 한의사제도 부활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회는 주권국가로서 법률 제정작업에 돌입하였다.

의료분야에서는 일제의 朝鮮醫療令을 대체하는 國民醫療法 제정작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보건부는 제1장 총칙(醫療人)에 의사, 치과의사제도만을 포함시키고 한의사는 배제시켰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의생으로 격하시켰던 한의사를 독립된 조국에서도 천대하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한 한의계의 반발은 엄청나서 전국적으로 12만통의 진정서가 접수되고 국회의원 조헌영 등이 반대함으로써 보건부가 제출하였던 법안은 폐기됐다.

부산피난시절인 1951년 1월 15일에 열린 2대 국회 임시국회에서도 사회보건위원회가 법률안을 제안했으나 의료인의 범주에서 한의사가 빠지자 부산 거주 韓醫인 이우룡 윤무상 우길룡 권의수 정원희 등이 주축을 이룬 한국의약회가 앞장서 국회 사회보건위원회에 한의사제도의 입법을 위한 증언을 신청해 김영훈 방주혁 박호풍 박성수 등 한의계 중진인사의 지원을 받아 국회 증언을 실현시켰다.

그 결과 ‘한의학은 비과학이어서 입법할 수 없다’는 양의계의 주장과 의사출신 보건부장관 차관, 국·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본회의에 명칭을 ‘漢醫師’로 하고 의료기관을 ‘漢醫院’으로 하는 수정안이 상임위를 통과한 데 이어 1951년 8월 13일 열린 본회의에서도 재석 116석 가운데 可 61, 否 18로 통과됐다.

그후 이 법안은 1951년 9월 25일 법률 제221호로 공포되고 1952년 1월 30일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 규정이 마련되어 한의사국가시험이 실시될 기틀이 마련됐다.

국민의료법 제53조 ‘의료업자는… 동업자회를 중앙에 배치하여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부산·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의사들은 대표단체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 이우룡씨를 상임위원장으로 한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경남, 전북, 경북 순으로 각 지방조직을 결성한 끝에 드디어 1952년 12월 10일 대의원 68명이 모인 가운데 총회를 개최해 총 12장 60조로 구성된 회칙을 통과시키고 회장에 이우룡 임시의장을 선출했다.

창립총회 후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여 1952년 12월 16일 ‘指令 제4435호’로 설립인가를 받음으로써 한의협은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정하고 제도권의료로서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의사 배출 교육기관의 확립

국민의료법의 통과와 대한한의사협회 창립 이전에도 한의학교육기관은 꾸준히 맥을 이어왔다. 일제하 경기도 의생강습소에 이어 해방후에는 동양의학전문학교-東洋大學을 설립·운영하였다. 동양대학관은 1950년 5월 31일 제1회 졸업식(졸업생 20명)을 배출한 지 한 달도 못되어 6.25가 발발해 대학승격의 꿈이 물거품되고 피난지 부산에서 흩어진 학생들을 모아 재기의 꿈을 키운 끝에 1953년 3월 5일 수업연한 4년의 정규대학으로 설립허가를 받아 서울漢醫科大學이라는 이름으로 1953년 4월 1일 부산 서대신동 천막임사교사에서 새로이 개강하게 됐다.

서울수복후 안암동에 교사를 마련하고, 교명도 중국의학이란 뜻이 담긴 漢醫科 대신 동양의학이라는 말이 더 합당하다고 보아 동양의약대학으로 개칭하였다. 이때가 1955년 3월 10일의 일이었다. 동양의약대학은 행림학원 김경진 이사장이 학교 운영기금을 전용하는 비리사건이 일어나 이사진을 물갈이하는 과정에서 학교운영이 공백상태에 있을 때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했다. 군사정부가 마련한 대학시설기준령에 동양의대가 저촉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3월 6일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3조 2항의 학교정비령에 의해 제1학년생의 모집을 중지당해 사실상의 폐교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더해 3월 20일 개정공포된 의료법 제14조 2항으로 인해 동양의약대학의 설립근거마저 없어졌다.

행림학원측은 고육지책으로 63년 3월 27일 각종학교인 동양의약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내고 한의학교육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동양의약학교 졸업생은 한의학사학위를 받지 못하고 한의사국시 응시자격조차 상실하게 되었다. 유일한 한의사 배출교육기관이 폐교조치되자 한의계는 한의사제도의 폐지로 받아들였다. 동양의학대학측이 폐쇄조치를 당하자 재학생과 동창회, 한의협 등 한의계는 이 조치의 부당함을 반대로만 일관하는 보사부를 우회하여 군정당국에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의과대학 승격안을 받아내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 의과대학으로 1964년 3월부터 신입생 40명을 모집할 수 있게 됐으나 교실 1천평, 운동장 4천평, 도서 8천권이라는 대학시설기준 벽을 넘치 못한 채 1965년 9월 3일 고황재단에 흡수 합병됐다.

그후 경희대학교 의대 한의학과는 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고 이어 1973년에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이 설립되면서 현재 11개 대학에서 년간 750명의 학사와 수백명의 석·박사를 배출할 수 있게 되는 등 비약을 발전을 이루게 됐다.

한의사의 제도권 편입 잇달아

한의협은 초기 양의사의 반대와 비방, 양약사의 한약침탈, 의료유사업자의 도전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국가의료체계의 편입을 끊임없이 시도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의료보험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한방은 1977년 7월 1일부터 실시될 예정이던 의료보험사업에 포함되었으나 보사부측은 ‘한약규격화가 선결문제이며 수가 등도 의사들의 문제를 참고해서 장단점을 연구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요양기관지정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에 대해 한의협 이사진들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할 바에야 한의사협회의 존재가치가 없지 않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등 보사부 방침을 공박하였다. 결국 한의계의 들끓는 여론에 굴복하여 84년 1월 1일 김정례 보사부장관이 ‘동년 12월 1일부터 충북 청주시와 청원군을 대상지역으로 하여 한방의료보험시범사업을 1~2년 동안 실시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보사부는 시범사업의 성공적으로 진행된지 1년 6개월이 지나도록 전국확대실시를 머뭇거리자 전한련과 한방의료보험확대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확대실시 요구가 빗발치자 한의대교수, 한의협 시도지부에서도 촉구결의대회로 이어졌다. 회원정서를 확인한 한의협은 공청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공청회의 공식명칭은 ‘한방의료보험 전국확대 및 한방보건지도에 관한 공청회’였다.

각계의 여론을 인지한 보사부는 최수일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방의료제도협의회를 86년 9월에 구성하고 한방의료제도, 한의학발전, 한방의료보험 등에 관한 사항을 다룬 끝에 1987년 2월 1일부터 전국 2천 728개소의 한의원과 19개 한방병원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정부, 한의학 발전 주목하기 시작

정부의 한의학 소외와 홀대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일자 정부 일각에서도 한의학에 대한 시각을 바꿀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방의료제도협의회가 구성되기 이전에도 이런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한국개발연구원 보건기획단 연하청 연구원은 1980년 6월 한방의료보험의 실시와 국공립병원, 보건소에 한방진료부서의 설치 등 한방의료의 적극적인 활용방안이 국가보건정책적 차원에서 강구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그후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한방의료보험은 87년에 실시됐고, 국공립병원내 한방과는 국립의료원 한방진료부(91년 5월)로 구체화됐다. 보건소내 한방진료부서는 90년 3월부터 춘천군·영양군, 순창군에서 시작한 ‘농촌지역 한방보건의료 시범사업’이 성공함으로써 보건소내 한방진료실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고 2000년 12월 8에 병역법이 국회를 통과으로써 비록 제한적이나마 한의대 졸업생은 한방군의관과 공중보건한의사, 국제협력의로 갈 수 있게 되어 한의학의 제도권 편입을 가속화시켰다.

이밖에도 한약분쟁의 부산물로 설치된 한방의료담당관실은 국장급의 한방정책관실로 발전했으며(96년 11월), 최근에는 식의약청에도 한의사가 근무하는 등 갈수록 공직한의사가 늘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994년 10월에는 한국한의학연구소가 정부출연으로 신설돼 한의학연구의 산실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외형만큼 내실 따라줬나?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한의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야말로 존립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그 당시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의학의 모습이 갖춰지기까지 한의협을 중심으로 한 한의계 구성원 모두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외형이 커졌다고 발전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외형적 발전에 걸맞는 내포적 발전이 있어야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의학을 침탈하려는 세력에 맞서 한의학을 수호해냈어야 했고, 또 수호를 넘어 탄탄한 발전의 토대를 구축했어야 했다.

아직은 평가하기에는 이르지만 현재 한의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약간 회의적인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은 갈 길이 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어찌 보면 정부는 한방의료의 활용방안을 소극적인 차원에서 접근했을 뿐 한의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한 적이 없었다. 얼마전 복지부 차관이 국립 한의과대학 설립 필요성을 제기한 적이 있지만 아직도 국립 한의과대학은 설립되지 않아 한의학은 사적 의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의사의 빗발치는 요구에 마지못해 정부가 한 두 가지 수용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평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김승진 기자


◆ 한의협 50년사 주요 연표 ◆

1951년 9월 25일 국민의료법 공포
1952년 12월 10일 대한한의사회 결성총회(초대회장 이우룡)
1952년 12월 16일 대한한의사회 설립인가
1959년 12월 11일 사단법인 대한한의사협회로 인가
1961년 10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료법중에서 한의사제도 삭제안 통과, 이어서 한의대 폐쇄도 결의
1962년 9월 2일 한의협, 한의사제도폐지 및 동양의약대학폐쇄 반대 청원
1963년 4월 대한한의학회 창립
1963년 12월 13일 동양의약대학 부활
1964년 12월 16일 예과2년·본과4년의 동양의약대학 인가
1965년 9월 3일 동양의과대학, 경희대로 합병
1967년 12월 30일 협회 기관지 ‘한의사협보’ 창간
1975년 7월 4일 약사의 한약임의조제 규제에 관한 국회 본회의 부대결의 채택
1976년 10월 27일 국제동양의학회(ISOM) 창립, 28일 제1차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ICOM) 개최
1976년 12월 10일 국회보사위, 약사의 한약조제 금지 등 대정부건의안 채택
1978년 12월 16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929-3번지에 한의사회관 개관식
1979년 8월 27일 한방의료보험 요구 국민서명운동 착수
1979년 8월 28일 전국 3천 회원, 약사한약조제지침과 관련 반대결의문 채택
1982년 9월 18일 첫 한방기술의정장교 배출
1984년 12월 1일 충북 청주·청원지역 한방의보시범사업 실시
1986년 4월 9일 ‘韓醫學‘ 개칭 의료법개정안 국회 통과
1987년 2월 1일 한방의보 전국확대 실시(2천 682개소 한방의보요양기관 지정)
1987년 10월 10일 한의사에 보건지도 임무를 규정한 의료법 개정안 확정
1993년 1월 30일 약국내 재래식 한약장 설치금지조항(약사법 제11조 제1항 7호)을 삭제하는 내용의 약사법시행규칙을 입법예고함으로써 한약분쟁 촉발
1993년 6월 1일 보사부 의정국내에 한방의료담당관실 출범
1993년 12월 17일 한약사제도 신설을 뼈대로 하는 약사법 개정안 국회 통과
1994년 10월 10일 한국한의학연구소 개소
1995년 12월 17일 제1차 한약조제자격시험 실시
1996년 5월 16일 복지부, 한약관련 종합대책 발표
1996년 5월 19일 한약조제약사 2만 3천여명을 배출한 제2차 약사한약조제자격시험 실시
1996년 11월 13일 한방정책관실 설치
2000년 12월 8일 한의사가 한방군의관과 공보의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병역법 개정안 국회 통과
2002년 1월 18일 제1회 한의사전문의시험을 실시하여 245명의 합격자 배출
2002년 4월 1일 제34대 안재규 회장 취임
2002년 9월 8일 개원한의협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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