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醫學遺蹟 探訪記(10·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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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醫學遺蹟 探訪記(10·끝)
  • 승인 2004.03.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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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창 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사진上-장원소. 중국 금나라 때(12세기)의 의학자로 역수학파의 태두. (자료 : 동양의학대사전)
사진下-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 사건의 현장. 노구교에는 모두 485개의 사자상이 있는데 모습이 각기 다르고 살아있는 것 같다.

의인 형가와 형가탑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는 계속 앞으로 달려 易水를 건너는데 멀리 荊軻塔이 보였다. 荊軻는 전국시대 말 연나라 태자 丹의 부탁을 받고 진시황을 시해하기 이하여 秦의 서울 咸陽으로 떠났던 자객이었다.

그 내용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연나라 태자 丹이 일찍이 趙나라에 볼모가 되어 있을 때 함께 볼모로 와 있던 후일 진시황이 된 태자 政과 친하게 지냈다. 진시황이 즉위한 후 丹은 다시 진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는데 진시황이 예의로써 대우해 주지 않자 성을 내고는 몰래 연나라로 도망쳐 돌아갔다.

丹은 자객을 보내 진왕 政을 찔러 죽일 계획을 세우고 荊軻를 만나 이 일을 부탁하였다. 형가는 상대방이 믿어줄 물건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번오기(樊於期) 장군의 목과 독항(督亢)의 지도를 요구하였다.

번오기 장군은 진왕 政이 진나라 혈통이 아니고 呂不韋의 자식이라고 성토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연나라로 도망와 있던 진왕 政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었고 독항 땅은 지금의 북경 아래(하북성 탁州市, 동쪽의 固安 및 高碑店市 부근) 지역으로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었다.

바로 이 易水는 연나라 태자 丹이 荊軻를 진나라로 보내면서 이별을 했던 장소로 역사책을 보면 이때의 이별이 얼마나 애닯고 하늘에 사무쳤던지 형가가 이별의 노래를 부르자 그 때 흰 무지개가 태양의 한복판을 꿰뚫는(白虹貫日) 기적이 나타났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우리 의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B.C. 227년(甲戌年) 형가는 함양에 이르러 진왕 政에게 지도를 바쳤는데, 말았던 지도가 다 풀리면서 숨겼던 비수가 나타나자 왕의 소매를 잡고 찔렀으나 소매가 끊어지면서 왕이 도망을 갔다.

진나라 법에 신하들은 殿上에 한치의 무기도 지닐 수가 없어서 좌우 사람들이 단지 주먹만으로 칠 뿐이었는데 이때 侍醫 夏無且가 가지고 있던 약낭(藥囊)으로 형가를 쳤다는 기록이 전국책에 실려 있다.

그리고 다음 날의 논공행상에서 하무차가 최고의 공을 인정받아 황금 2백일(鎰)을 하사 받는다. 이로써 우리는 秦王의 곁에는 항상 의관이 약낭을 가지고 수행했음을 알 수가 있다. 진나라에는 醫官의 조직이 오래 전부터 정비되어 있어서 다른 나라에 비해서 名醫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荊軻塔은 荊軻山 위에 있는데 높이는 24m이다. 이 탑은 원래 聖塔院寺 안에 있던 절탑으로 이 탑이 있는 산 위에 “古義士荊軻里(옛 의인인 형가의 마을이다)”라는 비석과 淸代에 만들어진 비석에 “절과 탑은 山을 위해서 지었고, 또 荊軻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어 속칭 荊軻塔이라고 한다. 멀리 형가탑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벌써 易縣의 시내에 들어와 있었다.

장원소의 고향

여기서 우리는 張元素의 유적지를 안내해줄 관광가이드를 만나게 되어 있었다. 곧바로 우리는 가이드를 만났고 안내를 부탁하자 그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실망과 허탈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장원소는 12세기 금나라 때 易州(지금의 易縣)사람으로 易水學派의 鼻祖가 되는 사람이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큰 도끼와 긴 끌을 가지고 와서 심장을 파고 心竅를 열어 책 몇 권을 넣어주는 꿈을 꾸고부터 醫術을 洞徹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뛰어난 명의이다. 그는 특히 劉河間의 傷寒病을 치료하여 명성을 얻었고 《珍珠囊》 《醫學啓源》 《臟腑標本虛實用藥式》 등의 저서가 전해지고 있는데 유하간의 저서로 알려져 왔던 《病機氣宜保命集》도 사실은 장원소의 저작으로 최근에 인정받고 있다.

그의 학술적인 성취는 五運六氣의 활용, 五味 및 氣味의 厚薄과 升降浮沈에 대한 闡發, 歸經說, 引經報使說 등의 提倡인데 후세 의학에 대한 영향이 대단하여 李時珍은 內經이래 최고의 醫家라고 극찬하고 있다. 大揚醫理하니 靈素之下에 一人而已라). 지금 우리가 五臟六腑의 寒熱虛實에 따라 각각 쓰는 藥이 밝혀져 있는데 장원소가 확정한 것이다.

장원소의 유적을 하나도 볼 수가 없다니? 정말로 없는 것인지 아니면 가이드들이 성의가 없어서 찾아내지를 못한 것인지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쉽지만 시간은 우리의 안타까운 마음을 아랑곳 하지 않으니 미련을 가슴에 안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래水縣을 지나 高碑店市(옛 新城縣)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해 北京으로 돌아오면서 1937년 7.7 事變의 현장이며, 마르코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有一無二한 다리”라고 칭찬한 盧溝橋를 돌아보고 2박3일간의 답사여행을 마무리지었다.

2003년 여름에는 黃確樓 東湖가 유명한 武漢과 이시진의 고향 기춘현, 신농씨의 유적이 남아 있는 隨州市, 諸葛亮이 유비를 만나기전 10여년간 隱居했던 古隆中, 왕숙화의 무덤이 있는 양번시, 장중경의 고향으로 醫聖祠 武侯祠 등이 있는 남양시 등을 돌아볼 계획을 갖고 있다. <끝>

그동안 이 탐방기를 연재해 주신 필자와 관심있게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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