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醫學遺蹟 探訪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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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醫學遺蹟 探訪記(6)
  • 승인 2004.03.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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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光武帝 신임 얻은 28將의 하나

사진설명 - ① 약왕전. 1404년에 건립됐다. ② 대전안에 있는 약왕 비동의 좌상. ③ 약왕묘의 내부 모습. ④ 약왕묘 안에 있는 墓亭과 碑林.

안국 약왕 비동②

비동의 후손

비동이 죽자 아들 탕(湯)이 이었고 9년(A.D. 33)에 락릉후(樂陵侯)로 옮겨 봉해졌다. 19년(A.D. 43)에 탕(湯)이 죽자 아들(失名)이 이었다. 자식이 없거늘 나라가 폐지되었다. 원초(元初) 원년(A.D. 114) 등태후(鄧太后)가 비동의 손자 음(音)을 평정후(平亭侯)에 봉해 주었다. 음(音)이 죽자 아들 시(柴)가 계승하였다. 이상이 『후한서』의 열전에 있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기주지』(祁州志) 등 기타서적 속에 나타난 그의 의사로서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의술 배워 백성 구제

비동은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仁愛의 마음이 있었다. 그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西漢 말년은 사회가 혼란스럽고 재해가 그치지 않아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고 특히 질병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에 비동은 의학을 배워 제세구인(濟世救人) 하려는 뜻을 세웠다. 아버지 비길(비吉)도 벼슬길이 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의학을 배우는 것을 지지하였고, 명의들을 초청해서 가르침을 받게 하였다.

비동은 지혜가 뛰어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의술이 나날이 발전하였다. 3년이 안되어 그는 홀로 진찰을 하고 약을 처방할 수 있었다. 더욱 큰 발전을 위해 그는 과감히 부유한 가정환경을 버리고 집을 떠나 한편으로는 명의를 찾아 가르침을 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의료혜택을 못 받는 백성들을 위하여 질병을 치료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의학의 기초를 깊이 있게 다졌으며 풍부한 임상경험을 축적하였다. 이는 후일 군사 일에 바쁜 전쟁 중에서도 신속하게 백성들과 군인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치료하던 비동은 의술이 뛰어나고 의덕(醫德)이 고상하여 당시의 많은 백성들에 의해 신의(神醫)로써 칭송을 받았는데 지금까지도 하북성 중부 일대에는 비동이 신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살려내고 많은 난치병을 치료한 고사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술을 베푸는 것보다는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깨달은 그는 의학을 버리고 벼슬길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재주와 지혜, 그리고 아버지의 후원아래 짧은 기간 안에 화성졸정(和成卒正)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후 광무제를 도와 천하통일에 참여한 것은 앞의 『후한서』의 기록에서 언급한 바 있다.

A.D. 30년 비동은 지방을 순시하던 도중 안국(安國)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동은 광무제의 심복(心腹) 장수였고, 오랫동안 하북에서 전쟁을 하였으며 특히 안국 일대에서 민중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이곳의 관리와 백성들은 안국에다 비동을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구하였다. 광무제는 민의에 따라 이곳에 그를 장사지내게 했고 또 조칙을 내려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했다.

약왕묘 되어 천하에 이름 떨쳐

이후 비동의 사당은 본지토신(本地土神)으로써 천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곳의 사람들은 이 사당(皮王神閣 또는 皮場王廟로 불리어져 내려왔다)에 와서 단지 소원을 빌고 평안을 구할 뿐 아직 약왕(藥王)으로서의 지위는 형성되지 않았었다. 약왕묘의 원형은 북송 초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宋太祖 趙匡胤의 아들인 진왕(秦王) 趙德芳이 완질(頑疾)에 걸려 백방으로 치료를 했지만 낫지를 않았다. 어느날 밤, 진왕이 혼몽하게 잠이 든 사이에 문득 흰 수염을 한 노인이 다가와 맥을 잡았다. 진왕이 누구인가를 묻자 기주(祁州, 지금의 안국시) 남문(南門) 밖 사람이라고 하였다. 노인은 환약 몇 알을 꺼내 그에게 먹이고는 돌연히 사라졌다. 진왕의 병은 깨끗이 나았고 임금은 기주 남문 밖에 가서 그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으나 비로소 기주의 비왕(비王)이 현령(顯靈)하여 병을 치료한 것을 알게 되었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년) 송 휘종은 비동을 영황후(靈황侯)에 추봉(追封)하였다가 곧 이어서 영황공(靈황公)에 봉하였다. 남송 함순(咸淳) 6년(1270년) 도종은 명령소혜현우왕(明靈昭慧顯佑王)에 봉하였다. 황제의 칙봉을 받은 이후 약왕묘의 건축은 힘을 더 얻게 되었고 명성은 나날이 더 널리 전파되었다. 이로부터 비동을 약왕으로 하는 기주 약왕묘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타고 전국에 전파되어 참배하는 자가 나날이 증가되고 약을 다루는 자가 점점 많아져 사당의 건설도 확장되어 “기주약왕묘 약왕재기주(祁州藥王廟 藥王在祁州)”라는 명성이 민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중국에는 전국 각지에 수많은 약왕묘가 있지만 황제가 약왕으로 봉해준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명대에 이르러 당지의 토신(土神)을 제사하던 신각(神閣)은 일약 전국의 약계(藥界)에서 숭앙하는 신성한 전당이 되었다. <계속>

윤 창 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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