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醫學遺蹟 探訪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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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醫學遺蹟 探訪記(5)
  • 승인 2004.03.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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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光武帝 신임 얻은 28將의 하나

사진설명-① 안국시 약왕묘의 전면 입구 모습. ② 약왕묘 편액. 청나라 건륭 6년(1741년) 동각대학사 劉墉이 쓴 것이다. ③ 비동의 무덤 앞에 있는 비각. ④ 약왕빌딩 앞에 있는 약왕 비동의 좌상. 안국시 약품감독관리국과 안국시 의약관리국이 이 빌딩에 입주해 있다.


안국 약왕 비동①

중국 제일의 藥都인 安國市에서 약왕으로 모시는 비동 장군(B.C. 45~A.D. 30)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먼저 『후한서』 열전에 나와있는 비동장군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가 어떻게 중국 제일의 약재시장에서 약왕으로 숭앙받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성을 바치고 유수를 따르다

비동의 자(字)는 위군(偉君)이니 신도(信都, 지금의 하북성 衡水市의 冀州)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비길(비吉)이었고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지냈다.

비동은 처음 왕망의 신(新)나라 때 화성(왕망이 鉅鹿郡을 나누어 和成郡을 만들었고 治所는 下曲陽에 있었다)의 졸정(卒正, 태수에 해당함)을 지냈다.

후한 광무제 劉秀가 河北을 순행할 때, 하곡양(지금의 石家莊市 晉州로 安國·定州·深澤 등을 포괄한다)에 이르자 비동은 성을 바치고 항복을 하였다.

유수는 여전히 그를 태수로 삼고 며칠을 그 곳에서 머물렀다. 유수가 북쪽으로 가 계(지금의 北京과 그 부근)에 이르렀을 때, 마침 왕랑(王郞)의 군사가 일어나 그의 장수들로 하여금 지방을 순시하게 하니 이르는 곳마다의 현(縣)이 항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화성군(和成郡, 이 곳의 태수는 비동이었다)과 신도군(信都郡, 이 곳의 태수는 任光이었다)만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비동은 세조(世祖, 卽 유수이다)가 계 땅에서 돌아오고 있으나 군사를 다 잃고 신도현에 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먼저 오관연(五官연, 태수가 임명한 사람으로 태수의 手足역할을 했다) 장만(張萬), 독우(督郵, 태수를 보필하여 감찰의 역할을 했다) 윤수(尹綏)로 하여금 정예 기마 이천여 필을 선발하여 길에서 세조의 군사를 맞이하였다.

비동은 곧 바로 세조(世祖)와 신도(信都)에서 회합하였다. 세조는 비록 이군(二郡)의 도움은 얻었으나 군사가 모이지 않자 대다수의 의견은 신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 장안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하였다.

대세를 꿰뚫어보고 일언이흥방(一言以興邦)하다

이때 비동은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 이르기를 “의논하는 사람들의 말은 모두 틀린 것입니다. 관리와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한나라를 그리워 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따라서 갱시(更始, A.D. 23년 왕망에 반기를 들 때, 新市·平林·南陽의 제장들이 세운 임금, 劉玄)가 천자를 일컫자 천하사람들이 호응을 하였고 삼보(三輔, 한나라 때 서울인 長安 주위의 땅)의 관리들은 宮을 청소하고 길을 닦고서 劉氏의 임금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한사람이라도 창을 메고 소리를 지르면 천리 밖에 있는 장수들이라도 성을 버리고 도망가 숨고, 사로잡혀 엎드려 항복을 청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니 상고(上古)이래로 또한 만물에 감응하고 백성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 점쟁이 왕랑(王郞은 한단에서 점쟁이 노릇을 하다가 군대를 일으켰다)은 한나라 성제(成帝)의 아들이라고 거짓 일컫고 오합지중(烏合之衆)을 모아 옛 연나라 조나라 땅을 횡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명공(明公)께서 두 군(和成郡과 信都郡)의 군사를 휘몰아 호흥하는 위세를 드날린다면 공격함에 어느 성인들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며 싸움에 어느 군사인들 굴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이제 이것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간다면 어찌 한갓 하북의 땅만을 잃어버릴 뿐이리오. 반드시 장안(長安)을 놀라게 하고 위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만약 명공(明公)께서 다시 적과 싸우려는 의지가 없다면 비록 신도(信都)의 군사들까지도 오히려 모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명공께서 서쪽으로 가버린다면 한단(邯鄲)성의 백성들은 결코 부모를 버리고 성주(城主)를 배신하고 천리나 되는 길에 공(公)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그들은 흩어지고 도망갈 것입니다.”

세조(世祖)는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돌아갈 것을 중지하였다. 그는 당일로 비동을 후대장군(後大將軍)으로 삼고 화성(和成) 태수는 여전히 겸임하게 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앞장서게 하였다.

당양(堂陽, 옛 治所가 하북성 형태시 新河縣 서북에 있었다)에 이른데 당양이 이미 다시 왕랑에게 붙어 있었다.

비동은 장만(張萬), 윤수(尹綏)로 하여금 먼저 관리와 백성들에게 상황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세조가 밤에 이르자 곧바로 성문을 열고 나와 맞이하게 하였다.

또 군사를 이끌고 백사적(白奢賊)을 중산(中山, 하북 定州市 일대)에서 격파하였으며 이로부터 항상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주군(主君)을 따르다

신도(信都)가 다시 왕랑에게 돌아가자 왕랑이 임명한 신도왕이 비동의 아버지, 동생과 처자식을 잡아 묶어 놓고서 사람을 시켜 친히 쓴 편지를 전하고 비동을 부르기를 “항복해 오면 벼슬을 내려 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다 죽이겠다”고 하였다.

비동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자는 집안을 돌볼 수가 없으니 나의 가족들이 지금까지 신도에서 편안하게 지낸 것은 유공(劉公)의 은혜 때문이니 유공께서 바야흐로 국사(國事)를 다투니 나는 사사로운 생각을 할 수가 없도다”라고 하였다.

마침 갱시(更始)가 파견한 장수가 신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왕랑의 군사는 도망가고 비동의 가족들은 살아날 수가 있었다.

한단(邯鄲)을 함락하고 나서 무의후(武義侯)에 봉해졌다. 건무(建武) 원년(A.D. 25년)에 영수후(靈壽侯)에 봉해지고 대사공(大司空)의 일을 행하였다.

세조가 낙양에 들어가 비동에게 태상(太常)벼슬을 내리고 한달 쯤 되어 소부(少府)로 바꾸었다가 이 해에 면직하였다.

다시 좌조시중(左曹侍中)이 되었고 항상 정벌(征伐)에 종사하였다. 건무 6년(A.D. 30)에 就國했다. <계속>

윤 창 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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