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醫學遺蹟 探訪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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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醫學遺蹟 探訪記(4)
  • 승인 2004.03.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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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河間사당

우리 팀이 다음으로 방문한 장소는 河間市에 있는 劉河間의 유적이다. 우리는 河間市에서 하늘 아래에서 가장 맛이 있다는 당나귀 고기로 점심식사를 하고, 하간의 고향을 찾아 출발을 했지만 가이드 아가씨도 정확한 위치를 몰라 처음엔 갈팡질팡했다.

간신히 전화로 위치를 알아내 사당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들어섰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동네 꼬마아이들이 차 뒤를 따른다. 우리일행이 사당 앞 공터에 내려 유하간의 사당으로 향하자 이번에는 동네 어른들까지 모두 나왔다. 촌장을 비롯해 아마도 100명은 모인 것 같았다.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재 이곳에는 유하간의 후손은 한 명도 살지 않고, 요령성에 그 후손이 남아있다고 했으며, 이 사당은 일제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을 동네사람들이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한국사람들로는 우리가 두 번째로 이전에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신순식 연구원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사당은 초라하였고 사당 왼쪽에는 역시 콘크리트로 지붕이 둥그런 衣冠塚을 하나 만들어 놓았다. 큰 기대를 가지고 갔지만 남아있는 유적이 거의 없어 많은 실망이 컸다. 하지만 모여든 동네 사람들을 보면서 유하간 선생의 신명(神明)이 動하여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이들을 모이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유하간. 그는 일찍이 素問을 100讀 이상 읽었고, 金나라 章宗의 세 차례에 걸린 초빙에도 응하지 않고 벼슬을 거부하여 황제로부터 高尙先生이란 호를 하사 받기도 했다.

평생을 民間에서 의술을 베풀면서 醫學史上 황금기인 金元醫學의 신기원을 연 첫 번째 인물로써 수많은 의서를 저술한 유하간. 그의 의학은 荊山(산동성 諸城縣 東北)의 僧人에 의해 羅知悌에게 전해지고 나지제는 다시 朱丹溪에게 전하여 明淸代로 전수가 되지만 그의 유적만은 고향 땅에 남은 것이 거의 없어 일말의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사당 내부 신단에는 유하간의 泥造像과 左右補處童子像이 있었고, 벽의 左右에는 붓글씨로 쓴 “陳希夷授守眞留下神醫術 金章宗賜完素高尙先生稱(진희이는 유하간에게 神妙한 의술을 전해주었고, 금나라 장종은 유하간에게 고상 선생이란 칭호를 하사해 주었다)”라는 대련이 붙어있었다.

안국 약재시장의 약왕 비동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藥界의 聖地요 유일하게 황제가 藥王으로 봉해준 藥王廟가 있는 安國市였다.

중국에는 많은 약재시장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하북성 安國市(옛날의 祁州)는 天下第一藥市로서 또한 藥都로서 중국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약재 시장이 형성되면 시장의 번영을 위하여 행업신(行業神)을 모시는 약왕묘(藥王廟)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중국 각지에는 각기 다른 약왕을 모시는 많은 藥王廟가 있지만 藥都인 안국시에서 약왕으로 모시는 주인공은 놀랍게도 운대(雲臺) 28장 중의 한 사람 이었던 비동(BC45~ AD30) 장군이다. 28장이란 A.D. 60년 明帝때 후한을 창업한 광무제를 도와 천하통일의 큰공을 세웠던 28명의 장군을 하늘의 28수에 맞추어서 南宮의 雲臺에 그려 붙였던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의 28宿와 28將의 배합은 다음과 같다. <계속>

윤 창 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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