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176] 御藥院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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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176] 御藥院方
  • 승인 2003.10.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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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방유취로 되살아난 元나라 宮庭秘方


이 책의 원간본은 元나라 許國楨이 至元 4년(1267)에 펴낸 것이지만 이미 亡失된지 오래이다. 혹간 1338년에 처음 간행된 것으로 적힌 책도 있으나 元代에 사용됐던 至元 연호(1264~1294, 1335~1340)가 같은 조대에 두 번 사용되었기 때문에 서력기원으로 환산할 때 착오를 일으킨 결과이다. 저자의 활동시기가 원나라 헌종~세조 연간임을 고려하면 1267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울러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고려시대일 것으로 여겨지는데, 세종12년(1430)에 이미 醫科取才 考講書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 중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醫方類聚」 引用諸書 가운데 하나로 많은 내용이 채록되어 비중이 높은 인용서로 활용되었으며, 「향약집성방」이나 「동의보감」에서도 적지 않게 인용하였다.

전서는 11권 5책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조선판은 ‘癸巳新刊御藥院方’이라는 표제로 되어 있다. 원판을 복간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 중간판(갑진활자 인본)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인데, 일본에 전해지고 있다. 또 ‘新刊惠民御藥院方’(24권)으로 이름 붙여진 을해활자 인본은 高鳴이 지은 御藥院方 原序에 許國楨이 교정을 보았다는 ‘御藥院壬寅所刊方書板’으로 추정되어 기록상 1246년에 펴낸 이 책의 祖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 이 중국 황실 비방이 살아남게 된 것은 오로지 조선의 의학서 출판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아쉽게도 오늘 소개하는 것은 조선판 「어약원방」을 저본으로 1798년 千賀芳久가 일본에서 다시 활자 인쇄한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중국과 일본에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의방유취」를 聚珍板 木活字로 복간할 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중국의 교점본도 「의방유취」 안에 인용된 ‘어약원방’의 내용과 대조하여 교감하였으니 이래저래 이 책의 전승에 조선의방서가 절대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御藥院은 원래 송나라 때 처음 설치된 궁정의약 전담기구로 金, 元에서 그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존속되었다. 宋代 唐愼微가 펴낸 「經史證類備急本草」의 ‘所出經史方書’에 이 책의 이름이 보인다. 따라서 송대에 이미 ‘어약원방’이 존재했었지만 지은이나 그 내용은 따로 전하지 않고 元代에 이르러 許國禎이 누적된 어약원의 처방들을 정리하여 처음 펴낸 것으로 보인다.

저자인 許國楨은 經史에 두루 능통한 인물이었지만 의술에 더욱 밝아 쿠빌라이가 태자일 때부터 의약을 侍奉하였으며 雲南 정벌에 종군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의 조부와 부친이 모두 지방장관을 지냈지만 의약에 밝은 인물이었고 그의 어머니 또한 황후의 병환을 돌보았으며 훗날 그의 아들 또한 태의원에 근무할 정도로 온 집안이 의술에 정통하였다. 그는 세조 즉위 후 提點太醫院事에 임명되었으며, 1248년 이 책보다 앞서 「至元增修本草」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은 治風藥, 傷寒, 一切氣, 痰飮, 補虛損, 積熱, 泄痢, 雜病, 咽喉口齒, 眼目, 洗面藥, 瘡腫折傷, 婦人諸疾, 小兒諸疾 등 14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宋·金·元 세 왕조에 걸친 궁중 처방 1000餘首가 모여져 있으며 대체로 丸散丹膏 등 기성처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수록 처방 중 상당 부분이 다른 처방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로 임상적 참고가치가 있다. 송대 이전에 사용된 궁중처방이 「太平惠民和劑局方」에 모아졌다면 송대 이후 원대까지 집약된 내용은 바로 이 책에 결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피부미용과 양생법에 관한 몇 안 되는 원나라 궁중비법이 담겨져 있으므로 참고해 볼 만하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02)3442-1994[204]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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