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171] 分門瘟疫易解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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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171] 分門瘟疫易解方
  • 승인 2003.09.0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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瘟疫과 사스


「조선왕조실록」 중종 37년(1542)의 기사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그해 2월에 함경도 일대와 강원도 홍천에서 여疫과 牛疫 등 돌림병이 돌아 사람과 소가 죽었다.

또 7월에는 전라도에서 1천명 가까이 많은 사람이 죽었고 12월에는 함경도 六鎭의 여러 고을에서 여疫과 흉년으로 人口와 戶數가 태반이 줄었다고 한다. 이 책은 이때 유행한 함경도의 돌림병에 대한 방책으로 급히 꾸며 해당지역에 배포한 방역서이다.

중종은 朴世擧, 洪沈의 주도하에 文世璉, 柳之蕃, 李倜, 鄭樞, 洪世河 등 內醫院, 典醫監, 惠民署 소속 의원들을 차출하여 여러 가지 方書에서 온역에 유효한 처방들을 모아 펴내게 하였다. 이 책을 편찬하는데 앞서 중종 20년(1525)에 찍은 「簡易 벽瘟方」이 모본이 되었는데, 1524년에 關西(평안도 일대)지방에 유행한 여疫에 대비하여 전염을 막고자 편찬했던 것과 계기가 동일하다.

이들은 전해 내려온 방서(舊抄)를 근간으로 60여방을 채록하고 여기에 다시 40여방을 추가하여 새로 꾸몄다.

전문은 鎭禳門, 不相傳染門, 服藥方術門, 勞復門 4부문으로 나누어 구성하고 여기에 藥名과 採取法을 더하였다. 전문은 한 구절씩 한문과 언해를 대역해서 풀이해 놓았기 때문에 일반인도 찾아 읽기 쉽게 하였다. 현재 초간본(을해활자본)은 전하지 않으며 이것을 복각한 목판본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나마 일부 내용이 결손되어 불완전한 상태로 服藥方 5장 이후가 떨어져 나가 원래의 모습을 알기 어렵다.

金安國(1478~1543)이 嘉靖 21년(1542)에 작성한 서문은 그의 문집인 「慕齋集」 권6에도 실려 있으며, 또 이 책의 서문과 간행사실이 金烋의 「海東文獻總錄」에 적혀있다.

그는 이미 중종 13년(1513) 同知中樞府事로서 「벽瘟方」과 「瘡疹方」을 직접 언해하여 農書, 蠶書와 함께 인출하여 팔도에 널리 배포할 것을 건의한 바 있어 의서와 농서 등 실용서의 편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인용서를 보면 鄕藥集成方, 簡易벽瘟方 등 전대의 本國方書와 함께 聖惠方, 千金方, 주後方 등 기본방서와 本草가 이용되었다. 또 運化玄樞, 傷寒類要, 永類鈐方 등 宋·元·明代의 의서명이 보이는데 대개 「의방유취」에 인용된 내용이다. 특기할 것은 高麗 醫書인 御醫撮要方과 神仙敎法이란 미확인서가 인용된 점이다.

고려 의서 「어의촬요」는 조선에서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에 일부 수록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이곳에서 한 조문이 나타날 뿐 이후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흥미로운 것은 내용의 諺譯인데 재미난 표현들이 많다. 예컨대 疫여病候는 ‘모딘병증후’, 不相傳染은 ‘서로전염치아니케할류’로 표기했는데, 병증이 매우 혹독하고 빠른 시간 안에 전염된다는 것 이외에 질병양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아 당시 유행했던 온역의 모습을 정확히 그려보기가 쉽지 않다. 또 많은 부분이 「간이벽온방」과 중복됨에도 불구하고 언해에서는 표현이 다소 달라진 것으로 보아 書名의 알기 쉽게 꾸몄다(‘易解’)는 말이 그저 요약했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雨期를 설정해야 한다는 기상학자의 제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여름 장마가 계속되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을 즐기기도 전에 올 가을 독감과 함께 사스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나간 여름 중국을 강타한 사스의 유행은 전 세계인을 공포에 떨게 했고 전쟁에 못지않은 가공할 위력을 보였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치열했던 돌림병과의 싸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이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훈을 주고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02)3442-1994[204]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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