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학문일까 기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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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학문일까 기술일까?
  • 승인 2013.01.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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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훈

조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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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의술은 주술의 영역에서 발전해 왔다. 고대 전설속의 명의를 꼽자면, 편작, 화타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편작은 주술을 쓰는 무당으로부터 갈라져 이성적 치료 방식을 적용한 최초의 한의사로 본다.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자의 병은 낫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이 바로 편작이다.

그는 생리-병리를 음양론에 따라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화타의 경우에는 잘 알다시피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조조의 두통을 고치기 위해 마취하고 수술을 하는 외과적 치료를 행하고자 했으나, 암살로 의심하여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쨌든 이때까지의 의사들은 서기 200년 경 또는 그 이전이라 전설에 가깝다.

한의학의 영역이 학문적 영역과 기술적 영역으로 구분된 것은 장중경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장중경은 잘 알다시피 그의 일족 2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장중경은 전염병을 깊이 관찰한 뒤 병의 진행 과정을 여섯 단계로 나누고 단계마다 특징적인 증상과 치료법 및 처방을 기록했다. 바로 이것이 유명한 ‘상한론’이다. 이것이 임상영역으로서 한의학의 출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동아시아 최고의 의학경전인 ‘황제내경’을 빼놓고서는 한의학을 말할 수 없다. 대우주와 인체라는 소우주의 조화, 기, 음양, 오행과 관련된 오장육부의 생리학, 기가 온몸을 순환한다는 12경맥 이론 등의 뿌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의학이 맨 처음 무당과 주술의 영역에서 발전해왔다고 말했고, 편작과 화타를 언급했고, 장중경의 ‘상한론’을 임상영역으로서 한의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한 것은, 한의학이 음양오행과 같은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전염병 치료 같은 임상영역에서 출발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이론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기술과 치료를 설명하기 위해 이론이 필요해지고 도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의학은 음양오행과 같은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전염병 치료 같은 임상 영역에서 출발한 학문”

그렇다면 이 기사의 제목처럼, 한의학은 과연 학문일까, 기술일까?

한의학의 학문적 영역은 유학자 출신의 유의(儒醫)들이 맡았다. 장중경은 사실, 화타가 활동했을 시기인 서기 200년경의 인물로서, 태수를 지낸 관리이다. 즉, 엄밀히 말해 유의(儒醫)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장중경을 시작으로 정치 관료 유학자들이 의학 영역에 뛰어들면서,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무의(巫醫), 신의(神醫)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기술의 시대에서 논리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제 치료 기술, 처방의 지혜는 그 발전의 제한을 받았다. 유학의 프레임에 갇힌 유의들은 장대한 논리만 펴기만 할 뿐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 의서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원사대가 중에서 평생 의사로 불리는 것을 싫어한 전형적인 유의인 이동원이 대표적이다. 이동원의 이론은 오행에 근거한 비위론(脾胃論)이 핵심 사상이었다. 또 주단계는 ‘유문사친(儒門事親)’을 쓴 유하간의 후계자로 음양오행론보다 더 관념적인 오운육기론의 추종자였다고 할 수 있다.

자, 다시 질문을 바꿔 보자. 한의학은 학문으로서 발전해야 할까, 기술로서 발전해야 할까?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한의학(韓醫學)에 대해 말해보자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고, 올해 발간 400주년을 맞이하는 ‘동의보감’이 탄생되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비화가 숨어있다. 그 비화에 대해 우선 살펴보고 넘어가자.

우선은 최종 책임자를 맡았던 허준이 서얼이었다는 점. 이 점은 적어도 정통적인 성리학(유학) 체제에 반하는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보이는 그런 차별에 대한 동병상련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허준은 서얼의 몇몇 유학자들과 어울렸는데, 깊은 연대감과 적지 않은 그들의 사상이 ‘동의보감’ 속에도 반영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더구나 당시 의원들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보이듯이 중인 계급으로 양반들로부터 낮은 대우와 차별 및 천시를 받기도 했다. ‘침구경험방’을 저술해 침의 대가로 명성을 떨친 허임 또한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니까.

두 번째는 조선 의학에 대한 기대 또는 자신감이 고무된 시기였다는 점이다. 선조가 ‘동의보감’ 편찬을 지시할 때, “요즘 중국의 의학 서적을 보니 모두 조잡한 것들을 모아 볼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당시 ‘의방유취’를 통해 중국 의학을 모두 흡수했고, ‘향약집성방’으로 토종 약물에 대한 분석을 완성했던 시기였기에, ‘동의보감’이라는 위대한 서적이 탄생한 것이다.

‘동의보감’은 의학서적 중 유일하게 음양오행론이나 유학적 프레임에 기대지 않고 도가(道家)적 해석과 정기신(精氣神) 이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론과 경험을 한데 어울러 한의학을 집대성한 것이다. 물론, 중국의 금원사대가처럼 우리나라에도 ‘침구요결(鍼灸要訣)’과 ‘의학변증지남(醫學辨證指南)’을 저술한 유성룡 대감이나 다양한 책을 저술한 정약용 같은 유의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태수를 지내며 ‘상한론’을 지은 장중경과 같은 정치 관료 유학자들이 의학 영역에 뛰어들면서 사실상 의학이 발전되어 왔고, ‘동의보감’과 같이 위대한 기록유산으로 남아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유의들이 실제 임상경험을 소홀히 한 채, 너무나 장황한 논리에만 매였던 것은 비판점으로 남는다.

깔끔하지는 않지만, 초기 글 쓸 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는 대체로 담긴 것 같다. ‘의학 오디세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해부학과 식물학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이 든 정원사와 솜씨 좋은 푸줏간 주인은 식물학과 해부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만 질병을 알지는 못한다. 질병을 배우려면 환자의 침상으로 가야만 한다. 의술은 실천과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 시드넘 ‘의학의 기술’(1669)

경험만이 유일한 지침이다. 경험은 올바른 이성의 지침에 따르는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사색의 결과가 아닌 상식의 제안을 따라야 한다. …질병의 역사를 기록할 때 모든 철학적 가정은 버려야 한다. 그런 다음 질병의 명확한 자연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그 현상들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록해야 한다. 마치 초상화가가 아주 작은 점이나 부스럼도 놓치지 않는 것과 같다. …급성병은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고, 만성병은 환자 자신의 탓이다.- 시드넘 ‘의학의 기술’(1669) - 강신익 외, ‘의학 오디세이’, 103~104쪽

※ 위의 내용들은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과 생각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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