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方(傷寒論)의 이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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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方(傷寒論)의 이해 (1)
  • 승인 2011.01.2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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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허브 학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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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誤讀’의 전통에서 벗어나, 正本淸源하여 經方을 제대로 이해해야

1. ‘誤讀’의 전통에서 벗어나야

成無己가 「傷寒論」의 전체 내용을 주석한 이후부터 많은 주석가들이 배출되었으며, 천 여편의 주석본이 나왔다. 이는 「傷寒論」의 연구와 전파를 촉진하였지만 주석가들 자신의 이해와 견해들이 「傷寒論」에 섞여 들어가게도 만들었다. 金元시대 이후의 사상은 장중경에 더욱 덮어 씌워져서 「傷寒論」이 이론, 학설, 전문용어 등으로 요약되거나 갈라졌으며, 이 현상은 「傷寒論」의 해석본과 교재로까지 범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후세 학자들은 물론이고 초학자들이 본래의 「傷寒論」을 잘못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誤讀’하는 전통이 형성되었다.

「傷寒論」 교재를 살펴보면, 1979년 「傷寒論選讀」 이후에 출판된 「傷寒論」의 각종 교재들은 모두가 宋·趙開美本 「傷寒論」의 배열위에 다시 편집자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그 장절을 나누고 있다. 이로써 「傷寒論」의 교재에는 원래 「傷寒論」이 갖고 있지 않는 내용들이 다량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太陽輕證, 太陽腑證, 太陽病本證, 太陽病變證, 太陽病兼證, 太陽病輕證, 太陽病類似證 등이 있다.

송대 朱肱은 경락학설로 ‘六經’의 실질을 밝혔고, 금대 成無己는 다시 ‘經證’과 ‘腑證’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청대 尤在涇은 ‘腑證’의 바탕위에 태양병편에서 ‘膀胱蓄水’와 ‘膀胱蓄血’의 개념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많은 전문용어들이 敎學을 통하여 후세에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에 「傷寒論」의 원래 면모와 내용이 전파되는데 있어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중경학술의 진정한 면모는 많은 연구들 속에서 나날이 모호해졌는데, 이는 각 의가들이 상한론을 연구하는 시각과 방법들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經方의 독립적인 학술 전통과 지위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傷寒論」을 항상 「黃帝內經」에 귀속시켰으며, 「내경」만을 전통의학의 유일한 이론적 근원과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내경」의 장부경락이론으로 「상한」을 해석하였는데, 예를 들어 「소문·열론편 素問·熱論篇」에서 언급하고 있는 ‘日傳一經’ 내용으로 「傷寒論」의 ‘傳變’을 해석하였다.

經方학술의 고증방면에 특출한 성과를 낸, 근대의 국학 대사인 章太炎은 ‘「傷寒論」은 왕숙화가 編寫를 한 이후에 兩宋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일관된 주장만을 펼치고 있다. 왕숙화의 잘못은 「내경」의 日傳一經의 학설을 중경학설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에 있는데, 이로부터 중경의 큰 뜻이 사라지게 되었다’라고 지적하였다.

2.「傷寒論」은 「內經」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傷寒論·序」에서, ‘乃勤求古訓, 博采衆方, 撰用 「素問」, 「九卷」, 「八十一難」, 「陰陽大論」, 「胎藥錄」幷「平脈辨證」, 爲「傷寒雜病論」合十六卷’ -고대의 준칙들을 부지런히 따르고, 여러 방들을 널리 채택해서, 「소문」, 「구권」, 「팔십일난」, 「음양대론」, 「태려약록」, 「평맥변증」을 찬용하여, 「상한잡병론」 16권을 만들었다- 라고 기재되어 있다.

成無己가 「내경」으로 「상한」을 해석한 이후에, 위의 구절로 인해 후세 사람들은 더욱 더 중경이 「내경」을 근거로 하여 「상한」을 저술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여기에 의견을 달리한 의가들도 있었는데 錢超塵은 「상한론·서」에서 두 단락이 중경이 저술한 것이 아니고 후대 사람이 보충해서 넣은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 중 한 단락은 “撰用”에서 “平脈辨證”까지 23자인데 그 근거로 아래 네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孫思邈의 「備急千金要方·序」에 인용된 중경의 「傷寒論·序」에는 이 23자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일본의 「康平本 傷寒論」에는 이 23자를 작은 글자로 “勤求古訓,博采衆方”의 아래에 적어두었다.

셋째, 1930년대 楊紹伊가 「伊尹湯液」에서 음율과 문체 등 여러 방면에서 이 23자를 분석하여 결과적으로 왕숙화가 보충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넷째, 山西중의연구원의 중의문헌학 전공자인 李茂如가 「醫籍序錄集稿」에서 「千金要方·序」를 근거로 하여 정확한 고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내경」과 「상한」의 학술사상과 그 체계가 다른 점에 있다.

「내경」에서 육경실질은 주로 경락장부의 개념이다. 일부 병증에 관한 개념도 다른데, 예를 들어 溫은 「素問·論」에서 ‘溫’과 ‘’을 함께 논하지만 「상한」에서는 ‘’에만 해당된다.

변증론치의 개념도 다른데 「내경」에서는 五運六氣의 변화를 위주로 병증을 논하고 「상한」에서는 먼저 六經을 변증하고 다시 方證을 변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3.「傷寒論」과 「神農本草經」은 一脈相承한다

晉시대 皇甫謐은 「甲乙經·序」에서 ‘伊尹은 성인으로 「神農本草」를 撰用하여 「湯液」을 만들었다. 伊尹以亞聖之才,撰用「神農本草經」以爲「湯液」’라 하였고, 宋本의 「傷寒論·序」에서는 ‘仲景은 이윤의 법을 따랐고, 이윤은 신농의 법을 따랐다. 是仲景本伊尹之法,伊尹本神農之法’라고 하였다.

「本經」은 「傷寒」보다 빨리 成書되었으며, 일부 학자들은 「傷寒論」에 실린 94가지 약물중에서 76가지 약물이 「本經」에 실려 있으며 그 약물의 효능에 관한 내용의 상당수가 비슷하다고 고증하였다.

「本經」에서 病證의 특징으로 약물의 효능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역시 「傷寒論」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本經」에는 ‘鱉甲은 맛이 咸하고 성질이 平하다. 心腹에 堅積과 寒熱을 다스리고 證을 제거한다’라 되어 있고, 「상한」에는 母를 치료하는 鱉甲煎丸에서 ‘主心腹堅積’이라는 작용을 취하고 있지, ‘滋陰’하는 효능을 취하고 있지 않다.

중경은 「本經」의 내용을 더욱더 발전시켰지만, 用藥, 配伍法度, 藥物制劑에서는 「本經」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傷寒論」은 「湯液經法」에서 비롯된다

晉시대 皇甫謐은 ‘이윤이 「신농본초」를 찬용하여 「탕액」으로 만들었다’ 하고, 또 ‘장중경이 「이윤탕액」을 널리 논하여 수 십권으로 만들었는데 임상에서 효과가 좋았다’라고 하였다.

송대 林도 이 관점에 동의하였다. 「輔行訣臟腑用藥法要」에서 정확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상한론」이 「탕액경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輔行訣」의 ‘梁·華陽隱居陶弘景撰’에서 ‘張機, 華元化, 皇甫玄晏 등의 여러 명의들이 「湯液經法」을 따라서 배웠으며, 그 중에서 육 십수를 뽑아서 산에서 질병을 예방하는데 썼다’고 기재되어 있다. 특히 외감이나, 전염병 등에 경방인 二旦, 六神, 大小等湯으로 다스렸다.

晉대 南陽의 張機는 이 여러 방약들을 근거로 하여 「傷寒論」을 저술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傷寒論」에 실려있는 小陽旦湯 즉 계지탕이나, 大白虎湯 즉 죽엽석고탕 등과 매우 흡사하다.

馬繼興은 고증을 통하여 ‘「輔行訣」과 「傷寒論」이 모두 「湯液經法」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상한론」은 「湯液經法」의 내용을 더욱더 발전시켰는데, 중경이 임상에서 方證相應을 표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半表半里’의 개념을 만들었고, 이로써 경방의 독특한 육경변증이론체계가 정립된 것이다.

자료제공 / 후시수(胡希恕) 명가 연구실 펑스룬 교수 (펑스룬 교수 프로필 1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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