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우리과학]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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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과학] 첨성대
  • 승인 2003.04.2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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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을 이어 내려온 ''반곡선''의 신비
돌 하나하나에 1년의 날수, 기본별자리 28수, 24절기 함축

예로부터 별을 보는 데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보정하기 위하여 별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었다. 전자가 미신적인 점성술이라면, 후자는 과학적인 천문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 하면 바로 ''첨성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첨성대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 천문관측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것은 단지 역사학자들의 몫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역사학자나 건축학자 중심으로 그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게 제기되고 있다. 즉 ''천문대''라는 설 외에도 圭表의 일종, 또는 천문사상과 지식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축물, 불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인 제단, 도시계획의 기준점적 구조물 등 실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천문대 반대론자들은 첨성대의 높이가 낮고, 올라가는 계단이 따로 없으며 내부가 좁아 관측자가 매일 출입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천문관측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불교의 우주관을 상징하는 종교적 제단이었을 가능성도 주장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옛날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첨성대의 기단이 사각형이고 몸체가 원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天圓地方思想''의 표현이었을 것이라 추측한 것이다.

이러한 논란은 학자들 사이에 20여년 동안 이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뾰족한 해답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단지 가운데에 뚫린 공간으로 사람이 오르내리며 천문관측을 하였다는 옛 문헌의 기록과 현재의 구조로 보아서 소박한 천문관측대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 아직까지는 우세한 편이다.

물리학자이면서 전통문화재를 연구해 온 남천우 전 서울대교수는 "첨성대가 상징적 건물이 아니라 천문관측을 목적으로 축조된 실용적인 건축물"이라고 단언한다.

즉 첨성대 정상부는 1.6평으로 실험결과 몇 사람이 작업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첨성대의 중간에 위치한 출입구도 오르내리기에 불편함이 없으며, 출입구를 아래쪽에 설치하면 오히려 건축물이 약해지기 때문에 중간 출입구로 들어가 거기서부터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또 모양이 원형인 것은 사각형 모양보다 구조적으로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첨성대의 ''瞻''은 ''우러러보다'' ''쳐다보다''라는 뜻으로 ''瞻星''은 ''별을 살피다''의 뜻이다. "삼국유사''에는 ''是王代鍊石築瞻星臺(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는 간단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온다. 여기서 ''이 임금''이란 선덕여왕을 가리킨다. 그 후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는 좀 더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첨성대가 세워지는 연대와 크기가 소개되고, 사람이 가운데를 통해 위로 올라가 천문을 관측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해석에도 불구하고,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 하나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높이 9.108m, 밑 지름 4.93m, 위 지름 2.85m의 구조물인 첨성대는 전체적인 외형을 보았을 때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즉 사각형의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꼭대기에는 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 놓았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1년의 날수와 같다.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 맨 위 정자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 중간에 나 있는 네모난 창 아래 위 12단의 석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한다. 또한 첨성대 꼭대기의 井자 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또한 석단 중간의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의 역할을 한다.

그럼 천문관측은 어떻게 하였을까?

첨성대 밖에서 사다리를 타고 중앙의 창문까지 올라가 내부로 들어간 다음, 거기에서 다시 2단에 걸친 정자형의 길다란 바위를 의지한 두 개의 사다리를 통하여 상부 井자형 상단부로 올라간다.

그 다음에는 상단의 서반부에 걸쳐 있는 개폐식 판을 닫고서 하부와 차단한 다음에 충분히 넓은 공간에서 국가의 吉凶을 점치는 천문관측을 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재미교포 건축가인 이동우 박사는 한국전통기술학회지에 ''경주 첨성대의 축조에 관한 구조공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이 박사는 논문에서 첨성대가 1,300여년 동안 그 원형을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특이한 반곡선적 형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는 세계의 어느 석조물과도 닮지 않은 신라 고유의 곡선미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근거로 첨성대는 모두 27단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1∼12단까지는 완만한 곡선, 13∼20단은 비스듬한 직선, 21∼23단은 직선과 직선을 연결하는 移變曲線, 24∼27단은 수직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복합 곡선형태는 안정성을 특별히 고려한 것인데, 현대 설계기법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공정을 거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건축물은 높이 올라갈수록 밖으로 밀어내는 팽창력이 생기는데 첨성대에는 이를 줄이는 세심한 설계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즉 "첨성대의 19단과 20단, 24단과 25단에 엇갈려 놓은 井자석은 에펠탑의 중간 중간에 놓인 수평 바와 흡사하다"고 부연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첨성대는 점성학적인 비중이 컸던 시대에 시작되었다. 신라시대의 천체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이어져 내려와 조선 세종 때의 천문관측소 ''서운관''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예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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