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역 한의계 열전(2)-이우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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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한의계 열전(2)-이우룡 선생
  • 승인 2010.01.0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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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수 김시영

신현수 김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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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면허번호 1호 임상의 대가

한의 면허번호 1호 임상의 대가

이우룡 선생이 한의협 창립 관련 인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한한의사협회 창립 산파… 초대 제2대 회장 역임

부산지역 한의계 열전(2)-이우룡 선생 

대한한의사협회의 결성을 말하려면 먼저 정인한의원 이우룡 선생님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우룡 선생님은 1905년생으로 만주국에서 한의학 공부를 하셨으며, 면허번호는 1번이다. 부산시 서구 토성동에서 정인한의원을 개설하셨으며, 당대 임상의 대가이셨다.

처방은 순수 창방을 하시어 환자를 대하셨는데 화제는 청대의 <석실비록>과 같이 주치 약을 중량으로 사용하는 처방이며 하루에 한 첩 복용하는 방식이다. 당시 환자가 경향 각지에서 몰려들어 청년시절부터 이름이 난 명의였다.

이우룡 선생은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국민의료법 제정을 위해 5인동지회의 일원으로 많은 활약을 하셨고, 국민의료법 통과와 더불어 대한한의사협회 창립을 주도하시어 초대, 2대 협회장을 역임하셨다. 교육에도 관심이 높아 부산의 동양의학전문학원을 인수하시어 운영하시다 나중에 서울 한의과대학의 설립을 계기로 자진 폐원하셨다. 그 뒤 부산에서 영남상업학교를 설립했고, 아직도 그 학원은 후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부산의 동양의학전문학원을 인수해 운영하시다 서울 한의과대학의 설립을 계기로 자진 폐원하셨다”


부산 동양의학전문학원과 이우룡 선생의 관계를 살펴보자. 해방과 더불어 한의학 교육의 열기가 시작되어 서울에서는 동양대학관(수업 년한 4년의 을종대학, 학장 박호풍) 수도한의전문학원(석유순)이 문을 열었고, 대구에는 대구동양의학전문학원이 있었다. 부산에는 1950년 6월10일 부산의 한의계 인사 홍봉술이 부산 동양의약전문학원을 설립하였고, 초대 학원장으로 정인목, 부원장에 이우룡, 권의수가 취임했다. 1기생으로 60명을 선발했지만 개강 후 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때는 서울의 동양대학관과 대구의 전문학원도 폐문 상태에 들어가 당시 남은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이다. 1951년에 들어서면서 정인목 학원장이 건강 악화로 사임하고 이우룡 선생이 동 학원을 이끌었다. 당시 이우룡 선생은 부산에서 한국 의약회를 주도하고 계셨다(당시는 한의사 제도가 없었고 한의사협회도 없을 때라 임의단체로 한국의약회가 있었다). 윤무상, 우길룡, 권의수, 정원희 등 5인 동지인 한국의약 회원들과 더불어 학원을 인수 운영하면서 국민의료법에 한의사제도를 포함시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다.

부산 동양의약 학원생들은 세 부족 위치에 있던 한의계의 상황을 수수방관만 할 수 없었다. 이들 재학생들은 학생회장 김영진(구명 김상호)의 지휘 아래 국민의료법안의 국회 심의를 방청하였다. 한양의 양측의 논전이 벌어지고 한의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동 학원생들은 환호로써 시위하기도 하였다. 이를 지켜본 당시 사회보건분과위원 김익기 의원은 법안이 표결에 들어가기 직전에 부산 동양의학전문학원의 존재를 들어 한의사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국회 본회의장의 분위기가 한의 측으로 기울자 이를 방해하는 외부 세력들은 육탄전으로 저지에 나섰다. 이때 재학생들은 외부 세력에 대항해 희생적 활동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양의학전문학원과 5인 동지회 이우룡 선생과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생활은 검소하셨으나 협회 일을 위해선 가진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열성적이고 헌신적이었다”

5인 동지회 분들이 모두 동양의학전문학원 강사이기도 하다. 국민의료법이 공포된 뒤 한의사제도가 생기고 한의사국가고시가 치러졌는데, 부산 동양의학전문학원(수업기간 1년) 졸업생 중 80% 이상이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이우룡 선생은 부산의 5인 동지회 여러분과 1951년 11월 한의과대학 설립 기성회를 조직했으나 서울의 동양대학관이 한의과대학으로 설립 인가를 받자 1957년 말 7회까지 38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동양의학전문학원을 동양의학대학에 편입시키고 학원 문을 닫았다.

이우룡 선생은 한의사제도의 법적 근거인 국민의료법이 공포되고 한의사국가 시험이 실시되고 한의과대학도 만들어지자 대한한의사협회의 설립을 준비하게 된다. 1952년 11월11일 경상남도 한의사회 사무소(부산시도 경남에 속함)에서 대한한의사협회 결성 준비 상임위원회가 열리고 준비위원장으로 이우룡 선생을 선출했으며, 회칙 기초위원으로는 정원희 박천래, 각 시도 한의사회 조직 촉구 대표에 유길영을 선임하였다. 이날 소요 경비도 이우룡, 권의수, 이길룡 등이 자진 부담했다. 1952년 12월10일 대한한의사협회 결성총회가 구성되었으며, 회장에 이우룡 선생이 피선되고, 그 뒤 2대 회장까지 지냈다.

이처럼 이우룡 선생은 당신의 생활은 검소하셨으나 협회 일을 위해선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열성적이었으며 헌신적이었다. 우리 후학들은 이와 같이 이우룡 선생의 높으신 애협심을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서 본받아야 될 줄로 안다.

신연수/ 대의원총회 예결산분과 위원장  
김시영/ 대의원총회 토의 안건 및 정관개정분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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