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의사회 캄보디아 해외의료봉사활동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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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의사회 캄보디아 해외의료봉사활동에 다녀와서
  • 승인 2009.07.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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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든 재진환자 “쭙리업 수어” 반가운 인사

2009년 7월 20일 오전 진료를 서둘러 마치고 지하철로 인천공항까지 두 시간 여를 달려 의료봉사에 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후 소형비행기에 몸을 싣고 낯선 땅 캄보디아로 향했다.
여한의사회 이사회에서 캄보디아 의료봉사활동을 결정한 후 들려온 600여명의 신종 플루 환자가 태국에 발생했다는 사실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번 여한의사회와 콤스타 연합 해외의료봉사엔 우리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로 따라가는 어린 여자 중학생이 2명이나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심조심을 다짐하며 씩씩하게 떠나기로 하였다.

■ 신종플루에 내심 걱정

우리보다 2시간 늦는 프놈펜에 현지시각 12시에 도착한 다음날 오전 8시 버스에 몸을 싣고 30분여를 달려 도착한 헤브론 병원엔 이미 환자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이 병원은 선교를 목적으로 한 자선병원으로 아침 일찍 환자들을 오게 하여 같이 기도하고 진료를 시작하는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진료 장비를 풀고 환자와 그곳 병원 관계자 분들과 함께 간단한 개소식을 치르고 통역을 도와줄 현지대학생 마라와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진료에 들어갔다.
부족한 영어와 전혀 모르는 캄보디아어로 인하여 언어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예상과 달리 고혈압 당뇨 중풍 등 성인병환자들이 많았고 소화기질환, 운동계질환, 안과 치과 피부과질환, 선천적 장애 환자도 있었다. 혈압이 높아 약을 처방받고도 아까워 먹지 못하고 지니고 다니는 할머니를 보며 의료쇼핑을 하는 한국의 일부 환자들이 생각났다. 예상외로 70대를 훌쩍 넘기신 노인 분들이 많이 계셨다. 정신없이 환자를 보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오후 진료를 끝낸 후 2년간 한국어를 배웠다는 마라와 얘기를 나눠 보니 그들에게 한국은 꼭 가보고 싶고 배우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마라에게 한국어를 사용하고 들을 기회를 많이 주는 것도 봉사의 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어 되도록 한국어를 많이 사용하고 잘못 쓴 단어는 교정해 주고 모르는 단어를 물으면 답해 주기도 하였다.

진료를 마친 후 돌아오는 거리의 풍경은 우리의 70년대 모습 같았다. 여기저기 집을 짓고 있었고 전기 줄이 길게 늘어져 있으며 호텔엔 브라운관 티브이가 놓여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할머니들도 내가 가진 휴대폰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다니는 듯했다. 마치 우리네 60,70년대와 21세기가 공존한다고나 할까? 인간의 욕심은 다 같다.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내 주위의 사람들이 같이 누리지 못한다면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사회복지개혁과 동떨어진 의료행위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의식주의 개혁과 발전이 없는 의료 행위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다.

■ 편리한 제형, 다양한 의료장비 있었으면…

둘째 날 다시 찾은 병원에는 어제보다 훨씬 많은 환자들이 몰려 있었다. 재진환자들은 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었고 ‘쭙리업 수어’ ‘쭙리업 리어’ 라는 어설픈 나의 캄보디아인사에 웃음을 보여주었다.
재진으로 온 환자들은 양약을 많이 쓰지 않아서인지 붓기도 많이 빠져 있었고 통증도 감소되었다고 하였다. 우수한 한약을 좀 더 편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제형변화가 이뤄지고 저가의 다양한 한방 의료장비들이 많이 만들어진다면 더 많은 의료혜택을 주고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려줄 수 있을 터인데 그런 점이 아쉬웠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의학연구원을 통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캄보디아인들은 그들만의 언어와 문자를 가진 자긍심 강한 위대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덕에 베트남의 호치민까지 다스리던 부강한 국가에서 단 40여년 만에 거의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활과 또한 그 후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하니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훈센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매우 좋아한다더니 한국의 국민체조와 새마을 운동을 본 딴 것인지 새벽에 거리에 나와 춤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고 거리엔 휴지 한 조각 볼 수 없었으며 수시로 주변을 쓸고 닦고 있었고 도로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벽에 찾은 왕궁 앞 똔레샵 강가엔 그곳에서 밤을 새운 듯한 맨발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많이 보였다. 같은 나이의 한국 학생 절반 밖에 안 되는 체구의 아이들이 남루한 옷을 걸치고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계속 솟구쳐 자제할 수 없었다.
우리 입장에선 작은 관심이지만 그들에겐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지원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책임감이 느껴졌고 우리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느 순간 그들처럼 빈국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희망과 사랑 확인한 1주일

단지 일주일 여의 봉사활동으로 그들의 병을 온전히 고쳐줄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일시적이나마 그들의 통증을 덜어줄 수 있고 그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주며 우리와의 만남이 자극제가 되어 한 사람의 인생에라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위안을 삼아본다.
봉사단원 중 아무도 아프지 않고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어서 우선 감사하고 항상 생각하지만 봉사활동은 내가 그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가 받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란 생각이 든다.

봉사활동을 위해 혼자서 베트남을 경유해 달려온 이민정 학생, 예진에 수고해준 이정주 학생, 밖에서 약을 나눠주고 잔심부름을 맡아준 박지수·강민선 학생 무거운 짐을 모두 옮겨주느라 애쓴 남궁진·노강산 학생, 특히 뒤에서 모든 준비사항을 도맡아 해 주고 진행해준 콤스타의 박보라 대리 등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진료에 전념할 수 없었을 것이며 봉사활동이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진료공간을 마련해 주신 김우정 헤브론병원장님과 김호순콤스타 단장님, 진료에 참여해 주신 박선희·조한숙·강락원 원장님, 그 외 여한의사회 임원진에게 감사드리며 안팎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는데도 어려운 시기에 봉사활동을 가기로 결단을 내려 강행해 주신 회장님 덕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 개인적으로 감사드린다.

김혜영
대한여한의사회 재무이사, 서울 동대문구 소창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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