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中 동북지역에 닻내린 한의학을 찾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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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中 동북지역에 닻내린 한의학을 찾아(3)
  • 승인 2007.01.1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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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소수민족의학으로 인정받는 한의학

■ 이삼윤 씨 일화②

두 번째는 허금자(64) 씨에 관한 일화이다. 허금자 씨에게 현재 30세 가량되는 딸이 있는데 그 딸이 2살 때였다고 한다. 그 당시 한창 문화혁명이 전국을 휩쓸고 다니던 때라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이 구호를 외치고 다니면서 지식인과 유지들을 압박하고 전통적인 것들을 파괴하던 시절이었다.

허금자 씨 남편(作故)이 당시 당의 간부였던 모양인데 하루는 이삼윤 씨를 찾아와 “당신이 하는 방법은 ‘土方法’이므로 당에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모든 의료행위를 삼가고 가지고 있는 침이며 도구들을 내놓으시오”했단다.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랐다. 그렇게 해서 같은 마을에서 허금자 씨 내외와 이삼윤 씨와는 원수아닌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마침 허금자 씨 2살박이 딸이 오랜 지병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얼마후 병원에서 이 아이를 살릴 수 없다고 해서 집으로 데리고 와, 힘없이 말라가는 아이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 사정을 전해들은 동네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삼윤이 아니면 못고친다.” “딱 이삼윤이 잘 보는 병이구만…” 결국은 아이를 업고 고개를 푹 숙이고 이삼윤 씨를 찾아갔다.

이삼윤 씨 집 문앞에서 아이를 업고 고개를 떨구고 서있으니 이삼윤 씨가 대뜸 “당신 남편이 침이며 기구들을 다 빼앗아갔는데 내가 무슨 수로 고치냐”하고 고함을 쳤다. 못내 낙담하고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내가 빼앗겼으면 다 빼앗겼겠나, 그래도 애가 불쌍하니 이리 데려와라”.
그날부터 치료해서 딱 4일만에 화색이 좋아지고 병색이 가셔서 지금은 30대 초반인데 잘 지낸단다.

이 허금자 씨 딸이 앓아서 죽을뻔 했다는 병, 그리고 이삼윤 씨가 잘 고쳤다는 병이 바로 ‘癖症’이다. 당시 병원에 가면 그냥 간염이라고만 진단받았다는데 이삼윤 씨는 이것을 침을 써서 드라마틱하게 치료해냈다. 앞에서 소개한 이성원 씨가 하도 신기해서 배워서 병원에서 시술했다는 침법이 바로 이 癖鍼이다. 상복부 중완근처 어디에 침을 놓고 피가 나면 피가 마르기전에 헝겊에 된장을 발라 침을 놓은 부위에 붙인다. 이렇게 3일 침을 놓고 4일 동안 된장을 발라놓으면 거짓말처럼 낫는단다.

이삼윤 씨의 6녀 이해순 씨의 말에 의하면 이 침은 꼭 해뜨기 직전에 놓기 때문에 식구들이 선잠을 깨기 일쑤였고 마땅한 헝겊이 없으면 그렇지 않아도 모자라서 형제들끼리 싸우기 일쑤인 자기들 이불자락을 뜯어가기도 했기 때문에 어려서는 무척이나 아버지의 그 침법이 싫었다고 한다.

이상 몇가지 일화는 그날 좌담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다.
필자의 좌담회에 참석해준 분들이 70, 80대 노인분들이기는 하지만 이중 몇 분만이 아주 어린나이에 부모를 따라 이곳으로 이주했고 대다수는 이곳에서 태어난 분들이다. 이곳의 한국한의학에 대한 유형 자료 즉 책이나 기타 메모, 의료도구 같은 것들은 고사하고 그나마 이전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분들이라도 계실 때에 자료 수집을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렇게 좌담회를 마치고 숙소에 가서 쉬고 있었는데 오후 3시가 지나면서 어둑어둑해진다. 가목사는 동경 130도, 북위 47도인 곳으로 지도에서 보면 경도상으로 서울보다 훨씬 오른쪽이며 위도상으로는 하얼빈보다 위쪽으로 러시아국경에 근접해 있는 도시이다.

■ 조선위생소의 조선족 의사

다음날 새벽 3시부터 서둘러 5시에 목단강시로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 11시에 목단강역에 도착해서는 이성원 씨가 소개해준 조선위생소라는 곳으로 갔다. 목단강시내에 있는 조선족거주구역 근처 ‘朝鮮中學’이란 곳을 갔더니 그 옆에 조선위생소가 있다. 정식명칭은 ‘社區衛生服務站’<사진>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지역보건지소에 해당한다. 거기 가서 우리가 온 목적을 말했더니 40대 초반의 조선족 의사가 우리를 맞아준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한 약간은 공적인 태도였는데 대화가 진행될수록 친해져 점심까지 얻어먹었다. 어머니는 경북 경주출신으로 2살 때 가족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전 한국에 있는 친척분의 초청으로 고향에 갔었는데 어머니의 호적이 아직 남아 있더란다. 그래서 어머니는 현재 한국에서 국적과 주민등록을 살리는 절차를 진행 중이라다고 한다.

어머니의 한국국적이 살아나면 자기도 자연 한국국적을 취득해서 한국에 갈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약학대학을 졸업했고 현재 이 보건소의 총책임자로서 국가의 지원을 일부 받지만 영리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루 12시간도 넘게 일하며 보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가봐야 이만한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기가 어렵지 않겠냐면서 난색을 보인다.

이 분을 통해 한국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분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얼마전에 흑룡강성에 건너와서 지내다가 분단이 된 뒤로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에 살면서 병원원장까지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척이나 솔깃한 이야기였지만 그분의 성함이나 활동내역 등 근거될만한 자료가 충분치 못해 후에 좀더 정확한 자료를 확보하면 그때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외 목단강시에 머물면서 그리고 연길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많은 영향력있는 분들을 뵈었고 다들 기회가 닿는대로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중국 동북지역의 한국한의학은 단순한 서적이 건너간 수준이 아닌 한국한의학의 주체가 대규모 이주를 통해 새로운 한국한의학의 줄기를 형성해간 거대한 문화이동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원천사료는 다른 외국보다 많은 편이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현재 중국의 동북일대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으며 그 민족의 이동을 따라 이주해간 많은 한국의 의학자들이 그들의 의료적인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그 기술과 문화는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비록 근자에 이르러 중국의 중의학에 섞이고 또는 중의학에 의해 밀려나기도 했지만 엄연히 중국정부에서 ‘보존하고 발전시켜야할 조선족소수민족의학’이라는 형태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한국한의학의 영향력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중국 동북지역 한국한의학자료조사는 사전정지작업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출장여정에 비해 실질적으로 확보한 연구자료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다만 향후 연구의 루트와 방향을 보다 확실하게 했다는 점에서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자리를 빌려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한의학연구원 안상우 박사님과 경희대 김남일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끝>

차웅석(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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